[베리타스알파=김하연 기자] 미생물학자의 전통 문화 탐색을 다룬 책이 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됐다. 이재열 경북 대 명예 교수의 신작 '살림의 과학: 과학자가 풀어 주는 전통 문화의 멋과 지혜'가 바로 그 책이다. 환경 미생물학자로 사과나 담배 같은 농작물을 망치는 바이러스부터 결핵균처럼 사람에 치명적 영향을 미치는 바이러스와 세균 등에 대한 선구적 연구를 수행하며, '보이지 않는 권력자', '미생물의 힘' 같은 저서와 번역서를 통해 인류 역사와 문명에 깊은 영향을 미친 미생물의 세계를 소개해 온 이재열 명예 교수는 동시에 전통 문화, 전통 과학, 문화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다.

그 성과로 2009년에는 한국 전통 문화에 숨어 있는 과학적 지혜를 정리한 '담장 속의 과학'을 펴낸 바 있다. 또 2013년에는 수십 년간 수집해 온 백제, 신라, 가야의 고대 토기 가운데 157점을 한성 백제 박물관에 기부했고, 동 박물관에서는 이 토기들을 정리해 2021년 기증 자료 특별전 "흙으로 만든 그릇, 토기"를 개최한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살림의 과학'은 이러한 활동의 연장에서 출간됐다.

이재열 교수는 전작 '담장 속의 과학'에서 "담장 속의 과학은 담장 밖의 과학과 만나야 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완벽하게 수량화, 계량화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전통 문화 속 지혜를 '담장 속의 과학'이라고 지칭하고, 우리 문화 밖에서 수입돼 온 '담장 밖의 과학'이라고 할 현대 과학을 만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통 문화에 대한 과학적 연구, 전통 문화 속에 담긴 과학의 맹아를 현대에 응용하고 발전시키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 주장이었다.

이 책의 출간 이후 10여 년이 지났고, 다행히도 전통 문화의 연구와 현대 과학과의 융합은 급속도로 진전됐다. 현대 과학의 교육을 받은 많은 연구자들이 전통 문화 연구와 계승에 참여하게 됐고, 전통 문화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축적돼 새로운 응용의 길이 열리고 있다. 최근 전 세계적 붐을 일으키고 한식, 한복 등의 붐에는 이 성과들이 녹아 있다. 'K' 자 붙은 수많은 활동에 담장 속의 과학과 담장 밖의 과학의 융합이 커다란 도움을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재열 교수는 이 상황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미생물학 연구에서 단련된 현미경적 시선으로 전통 문화의 더 깊숙한 곳, 살림의 이모저모까지 그 관찰의 시야를 좁혀 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림의 과학'을 추출해 낸다.

이 교수는 문 밖에서 전통 가옥 안으로 들어가 부엌, 안방, 대청, 사랑채, 마당을 훑으며 전통 살림의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과학적 지혜를 살피는 이번 책 '살림의 과학'에서 살림에 요긴하게 쓰이는 자잘한 가재 도구들, 집 곳곳에서 우리가 '살림살이'라고 부르며 써 왔던 것들을 세밀하게 살핀다. 최근 화제가 됐던 드라마에 등장하는 조선 시대의 전통 온실(세계 최초라는 평가도 있다.)을 '산가요록' 같은 오래된 농서(農書)를 통해 살피기도 하고, 그 책을 만든 전통 한지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하며, 전통적인 음식 조리법과 그 조리에 사용된 그릇들인 토기, 도기, 자기 등을 다루기도 하고, 미생물의 공격으로부터 음식물이 썩지 않도록 애쓴 조상들의 슬기로운 보관법을 분석하기도 한다. 또한 맛있는 음식에 멋을 더해 주는 소반과 매병 같은 우리 고유의 가구와 그릇을 찾아 자세히 소개하기도 한다.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미생물이나 들여다보고 있을 줄 알았던 과학자가 언제, 이런 데까지 다녀갔나 싶을 정도로 한반도 구석구석을 돌며 둠벙이나 민화 병풍, 베갯모, 반닫이, 갓, 이엄, 맷돌, 금속 활자, 석빙고 들의 온갖 꼴과 쓰임을 살피며 그 과학적 의미를 알뜰하게 살핀다.

여기에 더해 우리 문화재에 얽힌 흥미로운 논쟁사도 빠지지 않고 다룬다. '증도가자'를 둘러싼 금속 활자 연구자들의 사이의 논쟁을 치밀하게 소개하고 있어 최근 2025년 국정 감사에서도 지적된 문제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고, 수십 년째 해결되지 못하고 고착 상태에 빠져 있는 이른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에 얽힌 뒷이야기들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각 살림살이들에 대한 최신 연구들도 소개한다. 역사학, 민속학, 건축학, 각 분야의 젊은 연구자들이 각 분야에서 전통 문화의 가재 도구들에 대해 수행한 최신 연구들과 그 응용 성과들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원로 학자의 관심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

독자들도 이 책을 보다 보면, 집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잊혀져 가고 있는 사물들이 가진 의미를 새롭게 읽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담장 속의 과학'처럼 전통 문화와 현대 과학의 만남에서 새로운 이정표 역할을 할 것이다. 살림의 과학을 좀 더 깊이 살펴봐야 한다고. 그렇게 한다면 지금 전 세계를 매료시키고 있는 K-문화에 새로운 원동력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다. 어쩌면 독자들은 미래의 설계도를 전통 살림의 지혜에서,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재열 저자, 사이언스북스, 3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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