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의 시대 선도하는 ‘국가대표’

[베리타스알파=김경 기자] 개교 이래 20년 동안 민족사관고등학교는 많은 난관을 헤쳐온 ‘국가대표’ 고등학교다. 1996년 개교이래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입시환경의 변화로 자사고 후발주자인 외대부고 하나고 등 수도권의 거센 도전에도 맞닥뜨리기도 했다. 민사고가 그간 쌓아온 독보적 명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얘기다. 수험생과 학부모 입장에서 보면 쓸만한 대체 카드를 여러 장 쥐게 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대안이 생기면 작은 흠도 크게 보이게 마련. 강원 횡성이라는 지리적 격절감, 연 2200만원에 이르는 비싼 학비, 국수영 심층면접까지 치르는 막연하고 까다로운 입시전형 절차 등 민사고의 핸디캡이 과거보다 크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민사고는 여전히 민사고다. 입시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고 애초 설립이념을 바탕으로 교육의 진면목을 구현, 꿋꿋한 모습으로 원조 자사고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외환위기와 내신대란의 위기에 이어 다극화된 자사고 시대의 최근의 역경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겨내는 모습이다. IMF와 북한도발 등 많은 난관을 늘 그랬듯 극복해온 우리나라와 닮은 꼴이다.

<시련 이겨내니 더욱 버젓한 민사고>
민족사관고의 출발은 순전히 개인의 범상치 않은 소망에서 비롯했다. 전국의 영재들을 선발, 점차 퇴색되어 가는 민족혼을 살리고, 미래의 조국을 이끌어 갈 ‘대한국인’을 양성하겠다는 최명재(90) 설립자의 소망이다. 전북 김제 출신의 설립자는 서울대 상대를 나왔다. 상업은행에서 전공분야를 개척하다 택시운전도 해보고, 이란으로 진출해 운수사업도 했다. 목장사업에 진출했다가 87년 파스퇴르유업을 창업, ‘진짜우유’ 광고파문을 일으키며 당시 기존 우유업계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기인(奇人)으로, 혹은 열혈기업인상으로 각인되어 있는 인물이다.

▲ 민사고는 여전히 민사고다. 입시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고 애초 설립이념을 바탕으로 교육의 진면목을 구현, 꿋꿋한 모습으로 원조 자사고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외환위기와 내신대란의 위기에 이어 다극화된 자사고 시대의 최근의 역경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겨내는 모습이다. IMF와 북한도발 등 많은 난관을 늘 그랬듯 극복해온 우리나라와 닮은 꼴이다. 사진은 민사고 본관 격인 충무관. 기와를 얹은 건물양식에서 '민족 혼'을 강조하는 설립이념을 엿볼 수 있다. /사진=베리타스알파DB

설립자는 92년 10월,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소사리에 38만5000평의 터를 잡아 96년에 민사고를 개교했다. “기업이윤을 혈족이나 연고자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액을 민족 주체성 교육과 선진 문명의 한국화에 투자해 전 생애를 교육에 바치겠다”는 선언도 했다. 영국의 이튼스쿨 등 전통 있는 외국 명문고들을 두루 견학한 후 국적 있는 학교를 세우고자 건물에는 기와를 앉히고 곳곳을 ‘조국’과 ‘태극기’로 장식했다. 정문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다산 정약용의 동상을 세웠다. 세계인을 거둬 먹일 훌륭한 학문적 성과로 노벨상을 받을 미래 민사고인을 위해 ‘노벨상 좌대’ 15개를 학교진입로에 나란히 설치해뒀다. 학생들과 교사들은 개량한복을 입었다. 학생들이 드넓은 자연 속에서 심신을 단련하고 호연지기를 배양토록 하기 위해 교사 1인당 학생 7명 비율의 전액 무상교육으로 출발했다. 횡성 골짜기엔 전국의 뜻 있는 교사와 기업인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모여들었고, 설립자는 일일이 면담을 거쳐 교사자격증이 없는 이라도 인물이라면 뽑았다. 민사고의 교풍에 매료된 전국의 영재들이 속속 찾아왔다. 삼일절을 개교기념일로 삼아 입학식을 치르고, 입학식 땐 ‘독립기념문’을 낭독하며, 해외 어딜 가더라도 조국을 잊지 않도록 애국교육이 뿌리깊게 들어찼다. 전국에서 모인 영재들과 뜻있는 교사들은 신나게 ‘민족사관’ 교육을 이행해갔다.

대한민국에 다시 없을 교육을 실현시키겠다는 포부는 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와 함께 휘청였다. 모기업 파스퇴르유업이 부도를 맞으며 학교재정에 큰 타격이 생긴 것. 평균의 2배였던 교사연봉은 1.5배로 깎였고, 학생들은 학비를 내기 시작했다. 흔들리지 않았다. 학생들과 교사들이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광화문 거리에 나와 ‘파스퇴르 우유’를 돌리며 “민사고를 존립시켜줄 것”을 호소했다. 오히려 민사고인으로서 긍지를 느꼈다. 부도 직후 설립자는 “나이 70세 철들었습니다”라는 고백적인 카피로 ‘어떤 고난도 극복하겠다’는 솔직담백한 직설화법을 구사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그것이 민사고를 흔들진 않았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었다.

오히려 민사고를 흔든 건 다른 환경 요인들이다. 경제위기에도 꿋꿋했던 민사고가 ‘내신대란’으로 휘청인 것. 대입 내신강화로 국내 상위권 대학에 민사고 학생들은 진학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의 역량은 죄다 뛰어난데도 적은 학생수로 좋은 내신점수를 낼 수 없는 구조 탓이다. 시야를 해외로 돌렸다. 당시 해외유학은 유학원을 끼지 않고서는 힘들었다. 민사고 역시 해외유학엔 서툴렀다. 미국으로 영국으로 민사고 교사들이 직접 발로 뛰며 현장에서 배웠다. 민사고를 알리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뉴욕 한복판을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채로 활보하기도 했다.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 민사고는 한국교육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민사고 출신 학생들의 현장 학업능력은 뛰어났다. 그렇게 민사고의 네임 밸류는 명확해지고 시간이 갈수록 민사고의 해외대학 진학실적은 켜켜이 쌓여갔다. 해외대학의 입학사정관제와 맥을 같이하는 국내대학의 학생부종합전형에서도 괄목성과다. 정작 민사고 안에선 연연해하지 않는 입시결과를 민사고 밖에서 괄목할 정도다. 20년 전 민사고의 교육방향이, 20년 후인 지금 ‘학종’으로 대변되며 교육의 목표를 되새기게 할 정도다. 대입현장에선 학생 각자의 뚜렷한 진로를 고집해온 민사고의 진학지도 방향을 긍정적으로 주시해왔다.

지금도 민사고의 시련은 현재진행형이다. ‘유학을 생각한다면 민사고로’라는 민사고 설립취지에 맞지 않은 이미지가 사교육시장을 중심으로 씌워졌다. 파스퇴르 부도 이후 재정유지에 안간힘을 쓰면서도 교육의 질을 낮출 수 없어 불가피한 1인당 연간학비 2200만원이 세간에 알려지며 돈 있는 집안 자녀만이 갈 수 있는 ‘귀족학교’라는 낙인도 찍혔다. 전교생 기숙사 생활로 불가피한 학비상승의 배경과 영재교육의 취지 및 현황을 모르는 이들의 상황 모르는 지적이다. 후발 외대부고와 하나고가 속속 괄목할 성과를 내면서 전에 없던 강원 횡성이라는 지리적 격절감까지 수험생과 학부모 사이에 스며들었다. 자립형사립고 시범학교로서 국가적 지원은 받지 않는 대신 교육과정과 입학전형에 독립성을 법적으로 약속 받았고, 자율형사립고 전환 이후에도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지만, 외부 시선은 따갑기 그지 없다. 하지만 민사고는 여전히 민사고다. 불 같은 성미로 대단한 고집과 추진력을 보이던, 전신화상에도 불구하고 재활훈련으로 휠체어에 몸을 싣고 민사고 이사장으로서 출퇴근하던 설립자가 숙환으로 와병중이지만, 설립자의 깊은 뜻을 후배들은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설립자의 뜻을 이어받아 상대적으로 불리한 재정상황에도 높은 교육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민사고다. 학교가 교육수준을 유지해 성과를 내는 것만큼 강한 경쟁력도 없을 것이다.

<융합시대 예견한 민족교육과 영재교육>
개교당시부터 민사고를 지키고 있는 최관영 민사고 부교장은 “대학에서 배운 이상적인 교육과 가장 많이 닮았던 학교의 본래 모습을 20년 동안 지키고 발전시켜 온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며 “학생들을 세칭 일류 대학에 많이 보내는 것이 학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사고는 지난 20년간 입시 위주 교육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독특한 건학 이념과 투명하고 건전한 사학 운영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영재교육기관으로 성장해왔다. 수많은 역경과 위기를 겪으며 강인한 개척 정신과 위기관리 능력도 키워왔다. 이제 새로운 20년을 바라보면서 우리 학교는 경제적, 도덕적 위기 상황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직시하고 국가와 민족을 올바르게 이끌어갈 수 있는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더욱 노력할 것이며, 한국형 영재교육의 선도 학교로서 우리나라의 교육 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민사고의 굳은 의지를 밝혔다.

민사고는 설립자 최명재 이사장이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세계적 지도자 양성”을 교육목표로 설립한 “영재학교”다. 학생 선택 수업, 교사 연구실 수업, 개인 연구 프로젝트, 무학년 무계열 통합 수업, AP수업, 해외 진학 등 민사고는 이전까지 국내 고교에서 볼 수 없었던 실험적, 선도적 교육 방법과 내용을 개발 확산해 영재학교와 자율형사립고 출현의 모태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정상적으로 수준 높은 민족교육과 영재교육을 학생들에게 제공한다는 자부심이다.

교육의 본질적 측면에서 교육과정이 차별화돼 있다. 기본 교과, 일반 선택 교과, 심화 선택 교과, 대학 수준의 교과목 등 한 학기에 250여 개의 교과목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소질과 적성에 맞게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선택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나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옥 건물에서 한복을 교복으로 입고, 우리의 가락과 악기를 배우고, 국궁, 태권도 등 전통 문예를 연마하면서 선조의 얼과 전통 문화의 정수를 섭렵할 수 있도록 하는 민족교육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가 조국과 민족의 구성원임을 자각하고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해 민족과 세계문화 창조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내적 동기를 키워가고 있다. 국수영 문제 풀이 위주의 입시 준비 교육이 아닌 책을 읽고, 토론하고, 발표하고 에세이를 쓰면서 학문의 기본 역량을 키우는 방향으로 인문과 자연과학의 수준 높은 과목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풍부하게 제공한 것은 이미 20년 전에 현재의 융합시대를 예견한 듯하다. 교사 대 학생 비율이 1:6 정도에 불과, 대부분의 수업이 교사의 연구실에서 15명 이내의 수업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학생과 교사가 매우 친밀한 분위기에서 학업 수행이 가능하다. 수업의 밀도와 질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캠퍼스의 규모와 환경도 인성과 감성 함양에 매우 중요하다. 민사고는 사람이 살기에 최적의 고도인 해발 700m에 위치, 38만5000평의 드넓은 캠퍼스에 수려한 자연까지 갖추고 있어서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최관영 부교장은 “결론적으로 민사고 학생들은 민족교육과 영재교육이라는 민사고의 독특한 양대 교육 방침을 바탕으로 한 수준 높은 교육 인프라를 통해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 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헌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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