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열의 교육 돋보기]

최근 한 고교의 선생님들과 얘기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형식은 수시체제에 관한 강연이었지만 허심탄회한 얘기들이 오가며 고교의 고민을 민낯 그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동안 놀라운 실적으로 전국 명문으로 부상한 이 학교가 외부 강연을 요청한 것은 올해 갑작스런 서울대 실적 악화 때문으로 보였습니다. 사실은 서울대 실적 기사를 쓰면서 몇몇 전국 명문의 급락이 저 역시 궁금했던 대목이었습니다. 교장 교감선생님등 학교 당국자를 비롯해 선생님들의 열정은 여전했고 올해 경쟁률을 생각하면 전국모집의 선발효과역시 약화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통상 서울대 실적의 악화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정보가 부족한 지방 일반고라면 서울대 입학본부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울대 전형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신1등급은 돼야 지원한다는 미신이나 스펙이 약하다는 자괴감으로 아예 포기하는 경우는 많이 줄었다고 봅니다. 대신 여전히 특목 자사고를 상대적으로 많이 선발할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 아직 약한 학교프로그램에 대한 패배의식, 이번 샤포럼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학생부 작성을 둘러싼 난관으로 인해 서울대 수시에 대한 비관적 시각은 여전히 깔려 있어 보입니다.

대부분 학교들이 서울대 실적을 만들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학생부종합을 중심으로 한 수시체제의 미비 때문입니다. 수시체제를 갖추지 못한 이유는 우선 쉬운 길을 택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재학생이건 재수생이건 상관없이 학생 개인의 수능 점수에 의존한 정시 실적의 유혹은 뿌리치기 쉽지 않습니다. 학생부종합을 겨냥한 수시체제는 학생 학부모는 물론 학교 당국자를 비롯해 교사들의 동의와 협력 그리고 열정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전제로 합니다. 정량평가가 공평하다는 인식을 방패삼아 잘하는 학생들 중심으로 기존 관행을 유지하면 되는 정시 실적은 모두에게 오히려 편할 수 있습니다.

수시체제를 가로막는 원인은 수능연계로 교과서를 대체한 EBS 체제에 대한 안일한 접근에도 있습니다. 2학년까지 속진으로 진도를 끝낸 다음 3학년 교과과정 자체를 EBS 연계교재의 반복으로 진행하고 중간 기말고사역시 수능중심으로 진행한다면 수험생들의 관심은 오로지 수능에 매몰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올해 수능이 EBS체제로 안일하게 교과과정을 운영한 학교들에게 많은 교훈을 던졌다고 봅니다. 여전히 만점자 16명이 나온 ‘쉬운 수능’이었지만 도구과목의 변별력강화가 엄청난 파문을 던졌지요. 중하위권에게 유용해 보이는 EBS체제의 안일한 이행은 수시체제에 대한 관심 약화로 이어집니다. 학생들의 관심이 약화되면 수시체제의 핵심인 학생부 종합에는 아예 접근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EBS체제에 논구술이 더해진 교과과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최상위권이 많이 몰려있는 학교역시 수시체제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바로 의대열풍 때문입니다. 지속되는 취업난,과 확대된 의대문호는 최상위권에게 의대행을 당연시하는 풍토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의대열풍은 현재 70%를 넘어선 수시위주 대입에 맞서 최상위권을 중심으로 정시와 수능을 끌고 가는 최대 동력입니다. 자연계열 상위권들은 의치한 서울대 이공계 특성화대 순으로 선호도를 굳힌 상태이다 보니 의대가 정시 중심 전형을 바꾸지 않는 이상 서울대와 이공계특성화대학 모두가 학생부종합으로 전형을 끌고 가더라도 쉽지 않은 게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교사는 “ 공대 진학을 꿈꾸던 1등 조차 2,3,4등 학생들이 의대진학을 한다고 하면 내가 뒤질게 없는데 왜 공대를 가야 하지 하면서 관심도 없는 의대진학으로 돌아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현장에선 비일 비재 하게 벌어진다”고 털어놨습니다. 학교가 아무리 수시체제를 갖추고 싶어도 학생과 학부모가 맹목적인 의대진학을 고집한다면 학교 입장에선 정말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학부모를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영재학교나 과고에서 의대진학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는 입학설명회부터 의대진학을 차단하는 학교측의 꾸준한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근본적 해결은 전국 의대들의 전형변화에 있을 것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수능위주 전형으로 입결 좋은 학생만 선발하겠다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수학과학 귀신’ 보다는 다중미니 면접으로 잠재력과 인성을 바탕으로 선발하는 최고 학부 서울대 의대가 이미 선례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서울대 의대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의사의 인성문제를 계기로 손이 많이 가고 힘든 다중미니면접을 선택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전형변화의 필요성은 너무 분명해집니다. 최상위권 자연계열을 독식할 수 있다는 안일함에 취해 인재풀을 왜곡시키는 국가적 문제를 넘어서 고교에게는 수시체제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수요자에게는 재수를 확대시키는 사회문제의 주범이라는 자각역시 필요해 보입니다. 이제 의대들이 응답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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