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그 : 페르귄트 조곡 (Peer Gynt, Suite No.1 & No.2)

90년대 초 파리주재원 시절 북유럽으로 자동차여행을 떠났다. 영화나 TV에서 보았던 피오르드 풍광을 직접 가서 보고 싶었고, 베르겐에서 노르웨이 국민악파 음악가 그리그(Edward Grieg, 1843~1907)의 흔적들을 느껴보고자 계획한 여행이었다. 이태리 스페인 등 서유럽과 체코 오스트리아 등 동유럽까지 다녀온 후라 운전이나 캠핑에 자신이 있었기에 별 준비 없이 아내와 초등학생 딸 둘 함께 7박8일 여정으로 떠났다. 실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남은 것은 사진 몇 장과 지독한 감기였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라 지도로 대충 계산해서 떠난 여행이었는데 이틀도 되지 않아 후회하기 시작했다. 독일 북부를 통과하고 덴마크와 스웨덴 서해안을 거쳐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한 캠핑장에 도착하자 이미 휴가의 반을 보낸 셈이 되었다. 오슬로에서 대서양 연안의 베르겐까지는 450km, 고속도로가 아니기에 아무리 속도를 내도 8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다. 결국 베르겐까지 가긴 했지만 시내를 둘러본 시간은 고작 2시간 정도였고, 다시 파리를 향해 2300km를 운전해야 했다. 피오르드는커녕 그리그의 생가조차 방문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TV를 통해서나 볼 수 있게 된 그리그의 생가는 베르겐에서 가까운 트롤하우젠troldhausen이라는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소박한 이층집과 아담한 정원은 주변 산책길과 어우러져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 평생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머물고 싶은 곳이다. ‘그리그 생가’로 불리긴 하지만 거기서 태어나진 않았다. 음악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고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게 된 후인 42세 때,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마련한 거처이기에 완숙기의 그리그의 모습을 보다 생생히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다. 1907년 64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20여 년 그 집에서 작곡을 했고 유언대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바위에 그의 무덤이 남겨져 있다.

피아니스트였던 모친의 영향으로 일찍이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그리그는 독일 라이프찌히음악원으로 유학을 갔다. 멘델스죤과 슈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낭만적인 피아노 소품들을 많이 작곡해 ‘북구의 쇼팽’이라고도 불렸으나, 귀국한 후에는 친구이자 노르웨이 국가를 작곡한 노르드라크의 영향을 받아 스칸디나비아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음악들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60여 곡의 피아노 소품집과 실내악곡들 모두 아름답지만 특히 대표작인 ‘피아노협주곡’과 ‘페르귄트 모음곡’에서는 북유럽의 장대한 스케일이 낭만적인 서정성과 어우러져 그리그만의 독특한 음악세계가 펼쳐진다. 노르웨이의 풍경처럼 웅장하면서도 아름답고, 때로는 북해의 차가운 바람과 잿빛 어둠을 연상시키는 쓸쓸함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1869년 26세 때 발표한 피아노협주곡으로 명성이 높아진 그리그는 그로부터 5년 후 세계적인 문호로 추앙받고 있던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으로부터 시극 ‘페르귄트’의 부수음악 작곡을 의뢰받아 23곡으로 구성된 극음악을 발표했다. 초연은 대성공이었고 자신을 얻은 그리그는 그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곡 8곡을 추려내 두 개의 관현악조곡으로 편성했다. 극음악 ‘페르귄트Peer Gynt’ 전체를 연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각 4곡씩으로 편성된 두 개의 모음곡은 지금까지 그리그의 최고의 명곡이자 서양음악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관현악조곡 중 하나로 사랑받고 있다.

시극의 주인공 페르귄트는 영웅심이 강하며 난봉꾼이자 방랑벽이 심한 과대망상적 인물이다. 그를 사랑하는 두 여인, 어머니 오제와 연인 솔베이그를 남겨둔 채 부와 세속적 쾌락을 찾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다. 결혼식장에서 신부 잉그리드를 납치하기도 하고, 산속을 헤매다가 마왕의 딸과 사귀기도 하며, 모로코를 거쳐 도착한 아라비아에서는 예언자가 되어 추장의 딸 아니트라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미국에서 금광으로 부자가 되지만 귀향길에 폭풍을 만나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 산골 오두막집을 찾아가는데... 백발이 된 그의 옛 연인 솔베이그는 물레를 돌리며 아직도 페르귄트를 기다리고 있다.

모음곡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추려 본 극의 줄거리다. 현실감이 떨어지긴 해도 극적인 요소는 많다. 그리그는 극 내용과 무관하게 순서를 정해 관현악 모음곡을 구성했다. (제 1 모음곡) 1.아침의 기분/ 2.오제의 죽음/ 3.아니트라의 춤/ 4.산 마왕의 궁전에서 (제 2 모음곡) 1.잉그리드의 탄식/ 2.아라비아의 춤/ 3.페르귄트의 귀향/ 4.솔베이그의 노래. 제목만 봐도 각 곡들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상쾌함, 슬픔, 흥겨움과 두려움 그리고 한 여인의 지고한 사랑 등 인간의 감정들을 매우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게 음악으로 그려낸 그리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명곡이기에 한 장의 음반만을 고르기는 쉽지 않다. 카라얀 지휘의 빈필 연주는 모범적이고, 토마스 비첨 지휘의 로열 필 연주는 마지막 곡 ‘솔베이그의 노래’를 소프라노 목소리로 청아하게 들려주어 좋다. 꼭 한 장만 추천한다면 노르웨이의 지휘자 에이빈 피엘스타트Oiven Fjeldstad의 런던심포니 연주 음반을 고르겠다. 연주도 좋지만 60년 전의 녹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음질이 뛰어나다.

/유재후 편집위원 yoojaehoo5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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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qqKYgRFk8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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