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용 KAIST 입학처장 (산업및시스템공학과 교수)

봄꽃이 한창인 4월초는 KAIST 교정이 가장 예쁠 때이다. 글발이 잘 안 나가니 자연스레 눈은 창 밖으로 향한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활짝 핀 목련, 막 터져 나오는 벚꽃, 봄맞이 나온 동네 주민이 데리고 온 아이들, 학교 탐방 온 고등학생들, 벚꽃 아래 여기저기 모여 앉아 펼쳐진 딸기 파티. 모처럼 학교가 북적북적하다. 대지의 봄기운은 벚나무에게 넘치도록 생기를 불어 넣어 꽃망울로 “밀려”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번 주말에는 필자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가수인 “볼빨간 사춘기” 팀이 KAMF(KAIST Arts & Music Festival) 행사에 초청돼 KAIST를 찾아온다고 한다. KAIST 학생들의 염원이 그들을 “끌어” 들였나 보다. 햇볕을 좀 쐬면 글이 좀 써질까 해, 차 한 잔 들고 산책을 나서려 문을 밀었다. 아뿔싸, 당겨야 되는 문이군.

Push와 Pull은 문을 여는 방향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대립되는 관점으로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상품 개발을 수요중심형(Pull형)과 기술중심형(Push형)으로 대립해 볼 수 있다. 공부하는 형태 또한 Push형과 Pull형으로 나눠 볼 수 있다. Push형 공부는 향후에 널리 활용될 기반이 될 지식을 공부해 두는 것으로, 중고교 때의 공부뿐 아니라 대학교 학사과정에서의 공부는 대개 Push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본인의 연구를 시작하게 되면 또 다른 형태의 공부가 필요하게 된다. 관심사에 관련된 선행연구, 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선행연구를 찾아서 공부하는 Pull형 공부를 통해 그 주제에 대한 역사와 흐름과 현황을 파악한 후 연구를 진행해 나간다. 요즘 시대에 이러한 Pull형 공부는 대개 본인이 관심사에 관한 인터넷 검색에서 시작해, 위키피디아를 찾아보고, 동영상으로 쉽게 설명하는 자료를 찾아보지만, 많은 경우 이러한 방법으로는 만족할만한 이해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관련 논문과 같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처음에는 한두 편의 논문으로 시작하지만, 수많은 선행연구를 다 찾아 읽을 수 없으니, 이를 잘 정리해 놓은 전공 교과서에 다다르게 된다. 만일 Push형 공부에서 기초를 잘 다져놓았다면, Pull형 공부가 쉽게 끝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원 진학대신 직장을 선택해 취업하는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앞 단락의 ‘연구’를 ‘업무’로 바꾸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회사의 업무 수행에 필요한 지식은 너무 세분화돼 대학의 교육으로 해결될 수 없고, 그 상황에 맞는 Pull형 공부를 통해서 얻어져야 한다. 이것이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이 대학 교육에 대해 한결같이 “튼튼한 기초”를 닦아 줄 것을 요구하는 이유일 것이다.

Pull형 공부는 종종 자신이 Push형 공부에서 닦아 놓은 전공분야와 전혀 다른 내용을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 특히, 그 주제가 융합적일 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필자의 예를 들어보자. 필자의 전공은 “산업시스템공학”, 즉 공장이나 병원과 같은 산업시스템에 대한 설계와 운영을 다루는 분야이다. 고교 시절부터 화학과 생물 과목에 큰 흥미를 못 붙였던 필자의 연구실 한편에는 전공분야가 아닌 물리/생물/화학 등의 교과서들이 여러 권 꽂혀 있다. 약 15년 전, 생명공학연구원에 근무하는 한 친구(대학원시절 기숙사 룸메이트)와 함께 시도했던 공동 연구의 유물이다. 필자와 친구는 “세포는 단백질 공장과 같으니, 공장을 분석하는 시스템 다이나믹스 방법을 세포에 적용하면, 단백질의 작용 경로와 조절 기제를 파악하고, 나아가 신약개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해, 융합적인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이질적 분야의 연구자 둘을 데려다 놓는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융합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내가 먼저 세포 속으로 들어가 보자”라는 생각으로, 처음에는 관련 논문 한편을 읽기 시작하였으나, 당연히(?) 모르는 용어와 내용이 너무 많았고, 하나씩 따라가다가 결국 앞서 언급한 교과서들을 사서 때늦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시스템 생물학에서 시작해 분자생물학, 생화학,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피해왔던 일반화학까지. “어렸을 때, 두루두루 여러 분야를 공부를 해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뒤늦은 후회와 함께 한계를 느끼며 진행된 이 융합연구는 2년간의 시도 후,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일단 접기로 했다. ‘융합연구는 어려운 일’이라는 아픔과 ‘좀 더 넓은 분야에 대해 Push형 공부를 한 인재를 키우는 것도 필요하겠다’라는 교훈을 가슴에 남기고.

필자의 경험은 융합연구를 시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현상이다. 융합연구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의미 있는 융합적 주제를 찾는 일이고, 두 번째는 양쪽 분야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일이다. 이 단계에서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생기게 되면, 각 분야의 전문가로 팀을 꾸리고 양쪽을 이해하는 사람이 이끌어 가면 된다. 융합연구 활성화를 위해서는 이러한 역량을 갖춘 사람(Fusion enabler)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이것이 KAIST에서 “융합기초학부(가칭)”를 계획하고 있는 배경이다. 타 대학에서 시도되고 있는 “자유전공학부”는 단순히 전공 선택을 미루는 형태, 또는 기존의 학과에서 제공하고 있는 과목들로 개인맞춤형 전공을 구성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KAIST의 융합기초학부는 이와는 사뭇 달리, 기존의 학과구분을 뛰어넘는 기초 역량을 두루 갖춘 융합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무학과 track이 될 것이다. 수학, 기초 자연과학과 공학, 프로그래밍, 확률/통계, 데이터과학과 인공지능, 그리고 공학설계 등의 폭넓은 기초과목 중심의 커리큘럼과 교재를 만들고, 인문사회, 리더십, 기업가정신으로 채울 것을 계획하고 있다.

KAIST는 기존 학과 중심 교육에 융합기초학부를 더해 두 가지 track을 제공할 것이다. 본인의 적성분야를 일찍 파악한 학생은 한 학과를 정해서 깊게 파는 공부를 하게 된다. 반면, 융합기초학부에서는 높게 쌓아 올릴 탑을 위해 넓고 튼튼한 기초를 만들어 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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