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힘' 주제.. 2018뉴베리대상 수상

비교적 최근 책을 한 권 소개합니다. 2017년에 나온 에린 엔트라다 켈리(Erin Entrada Kelly)의 『안녕, 우주(Hello, Universe)』입니다. 용기와 이야기의 힘에 관해 말하는 이 책은 2018년 뉴베리 대상을 받고 미래의 고전이 될 거라는 평을 들으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6학년을 마친 버질 살리나스(Virgil Salinas)는 중학교 생활을 어찌 보낼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마치 결코 넘을 수 없는, 점점 더 높아지고 두꺼워지는 허들 앞에 놓인 것만 같습니다. 반에서 가장 작고 몸이 약한 데다 수줍음이 많은 버질은 아직 구구단도 외우지 못합니다. 게다가 쳇 불런스(Chet Bullens) 라는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동네에 사는 쳇은 길에서 만나기만 하면 ‘띨띨이’라 부르며 버질을 괴롭히지요. 버질은 가족에게도 이해받지 못합니다. 버질의 쌍둥이 형들은 버질과 달리 근육질에 키도 크고 활달합니다. 버질은 가족이 자신을 ‘거북이’라고 부르는 게 싫지만, 부모님은 버질이 그 별명을 싫어하는 것조차 모를 만큼 무심합니다. 버질은 가끔 자신이 형들을 만들고 남은 재료로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버질에게 힘이 되어주는 건 손주들 가운데 버질을 가장 사랑해주시는 할머니와 애완 기니피그 걸리버뿐입니다.

그런데 버질에게 더 괴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자, 버질 스스로 “대실패(Grand Failure)”라고 자책하게 만든 문제이지요. 목요일 보충학습 반에서 같이 공부하는 발렌시아 소머싯(Valencia Somerset)에게 말을 붙여보고 싶지만, 용기가 없는 탓에 6학년이 끝나도록 ‘안녕’이라는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버질은 “특별한 도움”을 찾아 자칭 점성술사 카오리(Kaori)를 찾아갑니다.

『안녕, 우주』는 발렌시아에게 말을 건넬 용기가 없는 버질의 고민에서 시작해서, 마침내 발렌시아에게 보내는 버질의 ‘안녕(Hello)’이라는 문자메시지로 끝을 맺습니다. 이성에 관심 두기 시작하는 십 대 청소년의 고민을 소설은 엉뚱하고 귀여운 인물들을 통해 풀어나갑니다. 책을 읽다 보면 점성술사를 자처하는 열두 살 소녀 카오리와 동생 겐의 엉뚱함과 사실 알고 보면 겁쟁이인 악당 쳇 불런스의 모습에 웃음이 터집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유머러스하다’는 평이 빠지지 않습니다.

'안녕, 우주'의 원서와 우리말 번역본 표지.
'안녕, 우주'의 원서와 우리말 번역본 표지.

사건을 중심으로 보면, 『안녕, 우주』는 아주 작은 변화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버질이 발렌시아에게 긴 망설임 끝에 고작 ‘안녕’이라는 문자를 보내게 될 뿐이죠. 하지만 소설의 중심부에는 주인공 버질이 깊고 어두운 우물 안에서 두려움과 맞서 싸우며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해나가는 큰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물 안에서 버질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부르듯이 ‘거북이’나 ‘띨띨이’가 아니라, 어둠에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바야니(Bayani)”, 즉 영웅이자 “태양신의 전사(son god of warrior)”로 자신을 규정합니다.

눈길을 끄는 점은 버질이 ‘전사’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할머니가 해주시는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필리핀에서 오신 할머니는 버질에게 지난 밤 꿈 이야기며, 자신이 살던 필리핀 마을에서 일어난 일, 필리핀의 전래 이야기 등을 들려줍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버질이 우물에 뛰어들 것을 암시하고, 우물 안에서 버질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말동무가 되어주며, 마침내 버질이 자신의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작가가 버질의 할머니를 통해 전해주는 필리핀 전래 이야기들은 필리핀계 미국인인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다 할 수 있습니다.

뛰어듦과 잡아먹힘 
‘바위 소년’과 ‘슬픈 왕 페데리코’, 그리고 ‘아마도’

6학년을 끝내고 시무룩하게 집에 돌아온 버질에게 할머니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위 소년(Stone boy) 이야기와 슬픈 왕 페데리코(Frederico the Sorrowful)의 이야기예요. 바위 소년은 할머니가 근래 되풀이하여 꾸는 꿈에 나오는 소년입니다. 버질과 그리 다르지 않은 수줍은 바위 소년은 지독한 외로움에 떨다가 숲으로 걸어가 바위에게 자신을 먹어달라고 애원합니다. 바위는 입을 벌려 주고, 바위 소년은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할머니가 해주신 또 하나의 이야기는 슬픈 왕 페데리코에 관한 것입니다. 정확히 필리핀 전래 이야기는 아니지만, 필리핀 문화의 정서를 담고 있지요. 어린 페데리코 왕은 항상 슬펐지만, 자신의 슬픔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강한 왕으로 여겨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더는 슬픔을 감출 수 없게 되자 분수처럼 눈물을 쏟아냅니다. 눈물은 홍수가 되어 온 나라가 물에 잠기고, 섬들은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됩니다. 어느 섬에 고립되어 있던 페데리코는 그만 악어에게 잡아먹힙니다.

바위 소년과 슬픈 왕 페데리코의 공통점은 둘 다 슬프고 외롭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는데요, 외로움에 떨던 바위 소년이 바위에게 간청하여 스스로 바위 속으로 뛰어 들어간 반면, 페데리코는 섬에 고립되어 있다가 악어에게 잡아 먹혔다는 점입니다. 바위 소년은 스스로 선택해 능동적 행동합니다. 빨간 나무에 마음을 빼앗긴 소년 아마도(Armado)가 사람들이 말려도 나무 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과 같지요. 아마도가 나무에게 반했던 것처럼, 바위 소년은 바위를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슬픈 왕 페데리코는 소통을 거부합니다. 바위든, 나무든,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억누르기만 했던 페데리코의 슬픔은 마침내 홍수처럼 터져서, 나라는 제각기 섬으로 고립되고, 페데리코도 섬에 고립되었다가 악어에게 잡아먹히고 만 거죠. 
바위 소년과, 페데리코, 그리고 아마도가 각각 바위, 악어, 나무에게 먹히는 장면은 ‘뛰어듦’과 ‘잡아먹힘’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버질처럼 수줍음 많은 한 소년이 지독한 외로움에 지쳐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 바위에게 자기를 먹어달라고 애원한다. 가장 커다란 바위가 자갈투성이 입을 벌리자, 소년은 그 안으로 뛰어들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a shy boy – not unlike Virgil – gets terribly lonely, takes a walk in the forest, and begs a rock to eat him. The biggest stone opens its gravelly mouth and the boy jumps inside, never to be seen again.

한 섬에 홀로 갇힌 슬픈 페데리코는 결국 악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Frederico the Sorrowful] wound up trapped on an island all alone until a crocodile came and ate him.

아마도는 그 나무에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나무로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모두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Armado] was so mesmerized by this tree that he decided to walk to it, even though everyone told him not to.

바위 소년과 슬픈 왕 페데리코, 그리고 아마도는 모두 무언가의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버질이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의 전조(foreshadowing)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뛰어드는가, 아니면 울다 잡아먹히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능동적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바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걸리버를 위해 기꺼이 우물 안으로 뛰어든 버질의 행동이 그러합니다. 진정한 용감함의 본질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이 없는 용감함은 만용일 뿐이지요. 친구들에게 뽐내기 위해, 뱀을 잡겠다고 베갯잇을 흔들어대는 쳇 불런스의 행위가 그 예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랑하는 애완 기니피그 걸리버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우물 안으로 뛰어든 버질은 처음부터 ‘바야니,’ ‘태양신의 전사’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눈을 떠. 그게 답이야 
‘파’와 ‘루비 산 살바도르’

할머니의 꿈속 바위 소년처럼 버질은 숲으로 걸어 들어가 돌로 된 우물 안으로 뛰어듭니다. 쳇이 우물에 던져버린 걸리버를 구하기 말입니다. 잠시 후, 숲을 지나던 발렌시아는 우물 뚜껑이 열린 것을 보고, 숲속 동물들이 다칠까 봐 우물 뚜껑을 덮어버립니다.

한 줄기 빛이 들어오던 우물 입구마저 뚜껑으로 덮이자, 버질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숨조차 쉴 수 없는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그런 버질에게 퍼덕이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립니다. 할머니가 얘기해주신 발라타마섬(Balatama)의 거대한 새 “파(Pah)”가 버질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할머니는 버질에게 7천 개가 넘는 섬들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들려주셨습니다. 파는 코끼리만큼 거대한 날개와 칼같이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새입니다. 탐욕에 눈이 먼 발라타마섬 사람들은 산짐승의 땅을 계속 빼앗다가, 파의 숲까지도 베어냈습니다. 분노한 파는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펴서 태양을 가려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에 갇혀 어쩔 줄 몰라 하며 두려워했고, 파는 그런 사람들을 집어삼켰습니다. 파는 어둠을 조종해 무기로 삼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 할수록, 파는 더 큰 힘으로 인간을 짓누릅니다. “안 돼, 볼 수 없어, 보지 않을 거야” 버질이 거부하고 웅크릴수록 파가 우물 안 전체를 모두 뒤덮고 채우는 것만 같습니다.

어둠의 괴물 새 파는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파는 우리가 겁먹을수록 커지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면 이내 사라져버리죠. 버질이 눈을 뜨자 파가 곧 사라져버린 것처럼요.

“눈을 떠. 그게 답이야."
Open your eyes, That’s the solution.

두려움을 대하는 법을 알려준 이는 바로 루비 산 살바도르(Ruby san Salvador)라는 소녀였습니다. 루비는 할머니가 살던 마을의 소녀입니다. 일곱 자매가 있던 루비는 유일하게 타고난 운명을 점칠 수 없는 소녀였습니다. 누구도 루비의 운명을 알 수 없었지요. 루비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어 온 마을 사람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루비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알아내려 마을을 떠납니다. 그 루비가 우물 안에 갇힌 버질에게 나타난 겁니다. 우물에 빠진 버질에게 나타난 루비는 자신의 운명이 바로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파처럼, 루비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버질은 다만 우물 안의 공간 속에서 루비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루비는 버질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버질이 생각한 것에 대답해주거든요. 이런 점에서 루비도 파처럼 버질의 내면에 있는 존재입니다. 파가 버질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상징한다면, 루비는 버질의 내면에 있는 용기와 지혜를 상징합니다.

“이 세상에 희망이 없는 것은 없어."
Nothing is ever hopeless

“절대 포기하면 안 돼."
You can’t just give up

“가망이 없어, 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
Never say, “there’s no chance”

버질이 약해질 때마다, 루비는 버질을 격려하며 두려움과 좌절을 이겨내도록 힘을 줍니다. 루비는 버질에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이끌고, 또한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하도록 격려합니다, 버질을 ‘바야니,’ 즉 영웅이라고 부르며, 자신을 거북이나 띨띨이가 아니라 용맹한 전사로서 정체성을 찾도록 돕는 이도 루비입니다. 루비는 할머니가 이야기를 통해 버질의 내면에 만들어 놓은 지혜롭고 강인한 힘입니다. 평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버질의 내면에 쌓여 있던 강인한 자아의 한 면이 우물에 갇힌 위급한 상황에서 튀어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작지만 큰 영웅
태양신의 전사, 그리고 파울리토

우물 안에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올리기만 하던 버질은 마침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너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라’는 루비의 말을 들은 버질은 발리섬을 생각합니다. 발리는 버질의 부모님이 가고 싶어 하는 곳입니다. 버질은 발리섬이 어떤 곳일지 상상합니다. 그곳은 늘 해가 지지 않아 전체가 빛으로 뒤덮인 태양신의 영토였으며, 버질처럼 껍데기에 싸여 있는 사람도 눈총을 받지 않는 곳입니다. 발리를 지배하는 태양신의 유일한 적은 “백 명의 암흑의 군주들”이었습니다. 땅의 중심부로 추방당한 그들은 오천 년 동안 잠들어 있습니다. 이 암흑의 군주들이 지하에서 깨어나 발리섬을 공격할 때, 그들을 물리칠 전사가 바로 ‘태양신의 전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버질 스스로 생각해 낸 이야기죠. 루비는 말합니다.
“그게 너야, 바야니! 네가 바로 태양신의 전사야.”
버질은 태양신과 암흑의 군주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태양신의 전사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하지만 약하고 소심한 버질에게 태양신의 전사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버질은 한숨을 쉬지만, 곧 다른 종류의 영웅을 생각해냅니다. 바로 할머니가 말씀해주신 파울리토(Paulito) 이야기입니다. 파울리토는 키가 3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 콩알만 한 남자입니다. 파울리토는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이 사소한 일로 걸핏하면 싸우기 때문이지요. 왕이 되어 싸움만 하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평화롭게 살게 하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왕이 되고 싶은 파울리토를 모두 비웃습니다. 사람들이 비웃고 싸움을 계속하는 동안, 파울리토는 한 움큼씩 바닷가에서 모래를 퍼와서 요새를 지었습니다. 어느 날, 거대한 배들이 몰려와 섬을 침공했습니다. 하지만 파울리토가 한 움큼씩 퍼온 모래로 지은 요새 덕분에 그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서로 싸움만 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켜준 파울리토를 섬의 왕으로 떠받들었습니다. 고작 3센티미터밖에 안되는 파울리토가 사람들을 지켜준 영웅이자 왕이 된 것이지요. 파울리토 이야기는 영웅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체격과 싸움 실력이 아니라, 작고 평범한 사람도 성실함으로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작고 약한 버질도 파울리토처럼 꾸준하고 성실하게 일해나가면 영웅이 될 수 있는 거죠. 할머니가 그립고, 우물 안에 갇힌 상황이 겁이 나서 울먹거리면서도, 버질은 아주 오래전에 할머니가 해주신 파울리토의 이야기를 기억해냅니다.

버질은 스스로 만들어낸 태양신의 전사 이야기와 할머니께 들은 작고 평범한 영웅 파울리토 이야기를 루비에게 해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다시 만들어갑니다. 자신은 거북이나 띨띨이가 아니라, 암흑의 군주들에게 맞서던 태양신의 전사이며, 파울리토처럼 비록 작고 약하지만 성실하게 노력하여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나는 안 돼”라며 스스로를 비하하던 버질이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재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버질의 내면에는 지혜와 용기를 주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가득 차 있었거든요. 이야기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물 안에서 너무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버질에게 힘이 된 건 바로 이야기였습니다. 루비는 버질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헬로!”, 한마디 말로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어.

‘거북이’ 혹은 ‘띨띨이’라 불렸던 버질이 우물 안에서 자신을 어둠에 맞서 싸우는 태양신의 전사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금방 우물 밖으로 나가고 영웅으로 변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버질은 자신이 비록 작고 약하지만 파울리토처럼 성실함으로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슬픔과 외로움, 두려움은 금방 사라지지 않습니다. 엄청난 슬픔이 밀려와 페데리코처럼 홍수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과연 자신이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좌절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변화는 행동에서 일어납니다. “헬로!” 포기하고 자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버질은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해 외치고 또 외칩니다.

“헬로”는 ‘안녕’이라는 인사를 의미하지만, 이 작품에서 버질이 말하는 ‘Hello’는 문맥에 따라 ‘도와주세요!’ ‘누구 없어요?’ ‘여기요!’ 등 다양한 뜻을 지닙니다. 친구나 가족에게조차 한 번도 소리쳐본 적 없는 버질은 우물 안에 빠지고 나서야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것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최초의 외침이었습니다. 루비가 버질에게 계속 격려한 것도 바로 이 외침이었습니다. 그 외침은 우물에서 구조되기 위한 것이지만, 또한 세상에 목소리를 내고 세상과 소통하는 외침이기도 합니다. 우물은 상징적 장소입니다. 우물이라는 어둡고 폐쇄된 공간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언제나 그곳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 세상과 소통해야 합니다. 버질이 거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지 않으려면, 거북이 등껍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물, 혹은 거북이 등껍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바로 세상에, 우주에 나의 메시지를 외치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멋진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우물에서 빠져나온 버질이 망설임 끝에 발렌시아에게 겨우 “안녕”이라는 메시지만 보낼 수 있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그 ‘안녕’이라는 한마디에서 시작해 앞으로 많은 것이 변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친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가요? 아주 작은 말이라도, 한번 건네보세요. 루비가 말한 대로, 한마디 말로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 다음 편 예정

다음 편에서는 루이스 로리(Lois Lowry)의 『별을 헤아리며(Number the Stars)』를 다룹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폭력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싸웠던 덴마크인들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어 더욱 흥미진진하게 느껴집니다.
 

함종선 mysstar@naver.com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미 에모리(Emory)대 박사후 연구과정을 수료한 후 서울대, 방송통신대 강사를 거쳐 민사고와 하나고에서 영어 교사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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