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위 민사고 부교장

이제 우리나라도 진보와 보수의 개념처럼 뚜렷한 정치적 성향을 각자의 국민들이 선택해 가면서 좀 더 성숙한 정치사회로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군사독재와 민주화의 시기를 살아온 기성세대에게는 어찌 보면 좀 더 당황스러운 현실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희망하고 갈구하면서 다 같이 수많은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고 외쳐왔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제 독재의 시대가 가고 민주의 시대인 지금 새삼 벌어진 자유와 평등의 치열한 힘겨루기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유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선택을 존중하고 이에 대한 보상의 차이를 인정하는 개념인 반면 평등은 개인으로서 똑같은 지위 욕구를 대변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만민은 법 앞에 같은 지위를 지닌다거나 학력이나 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한 표의 선거권을 행사하는 것이나 모두 똑같은 기회를 누려야 한다거나 기본 인권을 정의할 때 평등의 개념은 의미 있다.

왜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평등일까? 어찌 보면 가장 상반되는 두 개념이 민주주의 공존의 축으로 존립하는 이유는 제거할 수 없는 최종의 개념 혹은 어느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를 압도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오랜 갈등을 경험한 서구의 민주사회들이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고 좀 더 많은 사회복지를 실현하려 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솔선수범하는 이유 또한 이 두 개념의 갈등 속에서 공존하려는 행동양식은 아닐지 추측해 본다. 어느 한 쪽으로의 치우침은 결국 사회주의나 공산주의화해 생산성과 효율의 문제를 도출하거나 독점자본주의화해 약육강식과 부익부 빈익빈의 격차가 커지는, 더 큰 심각한 갈등과 혼란의 문제를 만들 수 있다. 결국 서로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고 공존의 의미를 찾는 것이 현재 민주주의에선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교육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우리미래를 위한 교육 역시 두 진영의 철학이 공존하고 있고 최근 강한 갈등으로 부딪히고 있다. 선택의 자유와 수월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과 평등의 확대를 위해 평준화를 주장하는 평등론자의 대립이 뚜렷해지고 있다. 최근 정권교체와 더불어 쟁점으로 떠오른 자율형사립고(자사고)의 폐지가 좋은 예로 보여진다.

자사고는 평준화 체계 속에서 사립학교의 설립취지에 따라 온전히 운영하고자 하는 학교법인의 의지와 그에 동조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재정결함교부금이나 개인별 교육비가 포함된 정부의 교육지원예산을 포기하고 법인의 전입금과 세간에서 비싸다고 공격받는 납부금을 스스로 지불하는 방식으로 운영해왔다. 학교는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하면 존립이 흔들리므로 최선을 다해 교육해야 하고 설립목적 달성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색다른 교육프로그램들이 경쟁력을 지니게 되면 대학의 평가가 좋아지고 이에 따라 대학진학률이 좋아지는 선순환구조가 형성된다.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포기하고 또 다른 교육비를 지불하는 불평등을 감수하면서 개인적 선택을 했음에도 평등론의 입장에서 보면 왜 그들만 좋은 교육내용이나 환경 또는 진학결과를 누리냐는 불평등적 시각이 두드러질 수 있다. 부모를 잘 만나고 못 만난 흙수저금수저의 불평등론이 강조되거나 입시를 위한 사교육 부담이 강조되거나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고교 교육의 본질이 변형되었다고 공격받게 된다. 모두가 섞여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존재하면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일반고 내에서도 혁신고나 과목중점학교가 이러한 자사고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모든 일반계 고교의 기본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진학 예비고다. 대부분 학생들이 원하는 대학의 순서가 이미 세워져 있다면 그 대학을 향한 좁은 문은 경쟁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미 평등론으로는 대한민국의 대입을 설명할 수 없고 학교 간, 개인 간 선택욕구에서 오는 경쟁을 막을 방법이 없다. 사교육 시장의 성장과 위세를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경쟁이 존재하는 한 사교육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교육은 그 틈새 보완에서 시작해서 어느새 군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반고만 있다 해도 경쟁하는 입장에선 어느 고교가 대학을 잘 보내는지 못하는지 판단할 것이고 어느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 만들어진 강남 8학군도 이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일반고 육성방안 가운데 거론되는 혁신고와 과목중점학교라는 대안은 평등론의 기본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모순이 된다. 또 다른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입제도는 이 문제로 반세기 이상 고민하고 있지만 자원부족한 국가에서 인적자원만이 살 길이라고 믿는 상황, 그리고 우리만이 아니라 지구상 어떤 나라와도 경쟁해야 생존할 수 있는 작은 국가라는 상황에 이르면 교육경쟁을 막을 방법은 쉽게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불평등론으로 본다면 정부가 세금으로 막대하게 지원하는 과학영재학교와 과학고 역시 가장 먼저 폐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입시에 필요한 사교육 투자나 학부모의 사회적 지위 등을 비교한다면 금수저론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 혹시, 그들이 이 나라와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점을 대중이 기대하고 있다면 자사고나 외고 출신 학생 역시 같은 기대를 받아야 합당한다. 이공계만 영재가 있고 그들만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인문학 성향 학생들에게는 또 다른 불평등과 차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등론의 입장에서 좀 더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보면 일류대를 위한 진학 중심 교육이나 진학결과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학생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가를 교육정책의 목표로 해야 한다. 지금까지 교육열과 사회적 갈등의 해소방안으로 정치권이 무수히 많은 대학정책을 만들고 그 결과 필요인력보다 더 많은 대졸자를 양성해왔지만 현재 그 정책들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행복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70~80%가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걸맞은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사회가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웬만하면 대학을 가는 정책은 결국 경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늦췄을 뿐이고 사교육과 공교육을 포함한 많은 교육비용을 사회와 가정에 좀 더 부담시켰을 뿐이다. 정치권이 교육열 최고인 국민을 향해 던진 희망고문 같은 것이라고 본다.

경쟁이 심해지면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 1등은 1등을 빼앗길까 불안해하고 2등부터는 앞에 누군가 있어 불행하다. 나아가 자신보다 앞에 있는 누군가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 미움은 또 다른 불행을 만든다. 1등을 제거하자면 자신이 1등이 될 확률이 조금은 높아진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은 찬성할지 모른다. 결국 또 다른 1등이 생길 것이고 만족할 때까지 계속해서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다. 설령 자신이 1등이 된다 해도 자신 역시 또 다른 제거 대상이 될 뿐이다. 1등의 확률이 높아질수록 사교육 투자확률은 더 높아질 뿐 사교육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5% 또는 10%의 학생이나 부모를 적폐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이에 의해 출발선이 다른 학생들을 같은 출발선에 억지로 모을 것이 아니라, 90%에서 95% 학생들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5% 학생들의 교육선택권을 빼앗아 평등이라고 하기보다는 다수의 대상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는 정책이 평등의 논리에 오히려 합당하다. 일부 집단에 비교와 질시가 시작되면 이미 평등의 이상은 깨질 수밖에 없다. 강제적 평등은 소수에 대한 다른 폭력과 차별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공부가 좋아서 공부를 하는 아이들도 있고 공부가 싫어도 할 수 없이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들도 있고 공부를 해도 따라가기 벅찬 아이들도 있다. 각자의 출발선에서 어느 정도 발전했는가 혹은 학교가 얼마나 그 발전에 도움을 주었는지 평가하도록 정책을 개발하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더 많은 수의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을 향한 줄서기가 행복과 직결되는 현실에선 백약이 무효하다. 고교 기본교육만 받아도 행복한 삶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현재의 사교육 문제도 없어질 것이고 자사고는 어쩌면 존폐의 논쟁조차도 필요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일반고를 먼저 바꿔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도한 경쟁이나 과도한 평등은 결국 모두가 패배하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민주주의가 자유와 평등의 공존을 기반으로 하듯 교육도 두 논리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헌법 또한 31조에서 능력에 따라 균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능력에 따라”라는 문구에서 자유주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고 “균등한 교육”에서 평등사상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툼의 목적이 어느 한 쪽의 말살이라면 공존은 불가능하다. 죽기 살기의 투쟁과 생존을 위한 갈등만 남게 된다. 결국 빼기의 행정이나 정치가 될 것이고 주도권이 바뀔 때마다 또 다른 투쟁과 갈등만 증폭될 뿐일 것이다. 그나마 진정한 사립학교 정신을 위해 의욕적이던 학교들은 희망과 동력을 잃을 것이다. 미래와 희망이 불분명하다면 누구도 투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미래를 위한 교육이 백년대계라고 누구나 강조하는 교육이 제대로 역할을 해가려면 자유와 평등의 공존을 지향해야 한다. 빼기와 나누기가 아니라 더하기와 곱하기의 공존을 통한 창발성이 확대돼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미래와 직결할 도전과제라고 교육계나 사회의 많은 원로들이 걱정하고 있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은 근본적으로 융합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시작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융합은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다양성은 공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민주주의의 다양성이 독재의 획일성을 이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빼기와 나누기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더하기와 곱하기를 통한 공존의 기본원칙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때임은 분명하다. 이 공존의 인식이 융합과 창발성의 4차 산업혁명의 시작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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