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샌프란시스코선언 후속조치

[베리타스알파=김민철 기자] KAIST가 돈 안되는 연구만을 선별해 최대 30년간 이색 지원에 나선다. 글로벌 챌린지 30 프로젝트는 누군가 꼭 해야하는 연구지만 돈과 시간, 성과창출 등 현실적인 여건상 할 수 없었던 연구주제를 택한 연구자에게 지원하는 사업이다. 올해 초, SKY카포 대학들이 모여 연구의 평가잣대를 정량평가에서 정성평가 비중을 확대해 ‘Fast Follower에서 First Mover’가 돼야 한다고 역설한 한국판 샌프란시스코 선언에 이은 KAIST만의 시도로 풀이된다.

KAIST는 ‘글로벌 난제나 인류 지식의 근본적인 물음에 답할 연구’를 선정해 최소 5년에서 최대 30년 동안 과제당 연간 2000만원을 지원하는 ‘글로벌 챌린지 30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최근 밝혔다.

지원과제는 기존의 통념과 다르다. 기존에는 돈 되고, 팔 수도 있고, 연구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주제가 대상이었다. KAIST가 지원하는 과제는 반대로 상업화와 상관없이 연구결과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과제는 학생과 임용한 지 5년 이상된 교원이면 누구나 신청가능하다. 다만, 신청과제는 △글로벌 난제 △기초과학 분야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 △현재 연구자가 주력으로 하고 있는 연구와는 무관한 주제 △외부에서 연구비를 받기 어려우나 학문 특성상 꼭 필요한 주제 ­ △현재 핫이슈가 아닌 주제 △10년 이내 상업화가 불가능한 주제 등 이 가운데 3가지 이상 해당돼야 한다. 

연구 제안서도 기존의 형식을 바꿨다. 제안서에 굳이 연구의 필요성과, 기대효과 등을 기재할 필요가 없다. 연구자가 연구 주제에 대한 개요와 현재 어디까지 연구가 진행됐는 지 그리고 본인의 독창적인 해결 방법은 무엇인지만 기재하면 된다. 제안서는 고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로 2~3p 내외로 작성해야 하며, 내달 말일까지 KAIST 자연과학대학 교학팀에서 제출받는다.

선정 후 연구자가 성실히 연구하면 최소 5년은 연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선정된 연구자는 매년 연차보고서를 제출하며, 처음에는 일반인들에게 평가를 받는다. 연구자가 제시한 기본 아이디어가 대중에게 와닿는 지, 성실하게 수행했는지 여부를 평범한 일반인들에게 평가 받게 되는 것이다. 3년이 지나면 연구자가 스스로 아이디어가 옳았는지 자체 검토해 계속 수행여부를 본인이 결정하게 되며, 5년 후에야 전문가로부터 성실히 수행했는 지와 아이디어 가능성 등에 대해 평가받는다.

KAIST는 이미 6월 프로젝트의 시범사업으로 교수 4명과 학생 1명 등을 선정했다. ‘거울상 분자의 기원 연구’,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타우단백질’ 등 5건의 선정된 주제에 대해 연구를 진행중이다. 하반기에는 10명 이상 연구자를 추가로 선정해 프로젝트를 본격화할 계획이다.

강성모 총장은 “연구가 외부에서 연구비를 받기 어려운 주제라도 꼭 필요한 주제라면 발굴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마련했다”며, “연구를 성실히 했을 경우, 전혀 성과가 나지 않거나 실패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했다.

▲ KAIST가 돈 안되는 연구만을 선별해 최대 30년간 이색 지원에 나선다. 결과물에 상관없이 연구자의 성실한 의지와 노력만을 보겠다는 KAIST만의 색다른 시도다. /사진=KAIST 제공

<KAIST 이색 지원.. 한국판 샌프란시스코 선언이 시발점>
샌프란시스코 선언은 2013년 세계과학자들이 모여 연구성과를 계량화하는 흐름에 반성을 촉구하고 9000여 명이 넘는 과학자들이 서명에 나섰던 것을 말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졌다. 올해 초 서울대와 KAIST, 포스텍, 연세대, 고려대 등 이공계를 대표하는 대학들이 모여 연구업적 평가의 잣대를 바꿔야한다고 나섰다.

5개 대학은 연구자의 도전과 열정이 정부의 정량평가에 가로막혔다고 꼬집었다. 5개 대학은 “우리나라는 논문의 양과 세계대학 평가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연구 업적의 질을 보여주는 피인용도는 OECD 하위권”이라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 연구자들의 노력도 있어야겠지만 우선 잘못된 평가방식을 개선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5개 대학은 발표한 공동선언문에서 “우리나라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지난 30여년 동안 논문의 양과 세계대학평가 순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정량적 연구실적은 거의 정체 상태이며 특히 피인용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고 말하며 “정량적 연구 실적 증가는 이제 정체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5개 대학은 “많은 연구들이 정량적 실적을 채우는 데 급급한 결과로, 남들이 해 본 연구를 따라 하면서 손쉽게 결과를 내는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연구자들의 노력이 수반돼야겠지만 그 근간에는 잘못된 연구업적 평가방식이 있다”고 지적했다.

5개 대학이 발표한 공동선언문은 미래부 등 관련 부처에 전달됐다. 미래부 최양희 장관은 “낡은 평가체계 전환기 맞았다”고 화답하며, 앞으로 연구자의 업적을 평가할 때 단순한 논문건수 성과지표는 원칙적으로 반영하지 않기로 했다. SCI논문 건수를 일일이 세지 않겠다는 얘기다. 이어서 발표된 미래부의 2017년 국가연구개발 성과평가 실시계획에 따르면, 미래부는 창의/도전적인 연구환경 조성을 위해 질적 성과 중심의 평가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2017년 국가연구개발 평가는 △연구자 중심 △질 중심 △자율성 확대 △정책/투자/예산의 연계 등을 원칙으로 시행된다.

대학만의 독자적인 노력도 이어졌다. 서울대 공대는 ‘10년 한 우물파서 홈런치기’ 프로젝트를 시행해 매년 3명의 교수에게 10년에 걸쳐 1인당 연구비 3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 초 서울대는 심사에서 논문 수와 피인용 지수 등 정량지표를 배제하고, 연구 주제의 적합성과 잠재 가능성만으로 평가해 인공지능 주제를 택한 정교민 교수 등 3명의 교수를 선정했다. KAIST의 돈 안되는 연구주제에 대해 30년 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은 프로젝트도 독자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한 과학계 인사는 “기초과학이 부족하다고 평가받는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시도들이 쌓이면, 언젠가 노벨상뿐만 아니라 인류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결과물도 나올 것이다”고 말하며 기대감을 표했다.

 
본 기사는 교육신문 베리타스알파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일부 게재 시 출처를 밝히거나 링크를 달아주시고 사진 도표 기사전문 게재 시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저작권자 © 베리타스알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