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 모험적 도전 인정해야'..한국판 샌프란스시코 선언

[베리타스알파=이우희 기자] 서울대와 KAIST, 포스텍, 연세대, 고려대 등 국내 대표 이공계 대학이 연구업적 평가의 잣대를 바꿔야한다고 나섰다. 정부의 연구업적 평가에서 정량평가를 지양하고 정성평가를 강화해야 모험적 연구가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5개 대학은 "우리나라는 논문의 양과 세계대학 평가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연구 업적의 질을 보여주는 피인용도는 OECD 하위권"이라며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 연구자들의 노력도 있어야겠지만 우선 잘못된 평가방식을 개선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밝혔다. 15일 서울대 등에 따르면 이들 5개 대학 연구부총장은 최근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해 정부에 연구자 평가방식 개선을 촉구하는 공동선언문에 합의했다. 이들은 공동 선언문을 교육부와 미래창조과학부,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전달할 방침이다. 한국 이공계대학을 대표하는 5개대학의 공동선언은 세계과학자들이 연구성과를 계량화하는 흐름에 반성을 촉구한 샌프란시스코 선언에 비견된다. 한국판 샌프란시스코 선언인 셈이다.  

<연구자 도전과 열정, 정량평가에 가로막혀>
5개 대학은 선언문에서 "우리나라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지난 30여년 동안 논문의 양과 세계대학평가 순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정량적 연구실적은 거의 정체 상태이며 특히 피인용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학술논문 수는 세계 10위권에 이르렀고 세계대학평가 순위 100위권에 드는 대학도 여럿 생겼지만, 정량적 연구 실적 증가는 이제 정체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이들 대학은 “많은 연구자들이 정량적 실적을 채우는 데 급급한 결과로, 남들이 해 본 연구를 따라 하면서 손쉽게 결과를 내는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연구자들의 노력이 수반돼야겠지만 그 근간에는 잘못된 연구업적 평가방식이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평가 기준인 SCI 국제학술지 논문 수와 '인용지수(Impact Factor)' 등 각종 정량 지표들은 독창적이고 모험적인 과제에 도전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서 “정량화된 지표에만 의존하는 평가로는 연구의 질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서울대와 KAIST, 포스텍, 연세대, 고려대 5개 대학이 공동성명을 통해 "모험적인 연구에 도전할 수 있으려면 정부의 연구업적 평가 방식이 정량평가에서 정성평가로 전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사진=베리타스알파DB
실제 우리나라 대학들은 ‘THE(The Times Higher Education)’와 ‘QS(Quacquarelli Symonds)’ 등 대표적 세계대학평가에서 100위 권에 진입한 반면, 논문의 질을 평가하는 ‘라이덴랭킹(Leiden Ranking)’에서는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 THE 세계대학평가에서 서울대가 85위에 오른 것을 비롯 포스텍 116위, KAIST 148위, 성균관대 153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세계 대학이 내놓은 논문 중 가장 많이 인용된 상위 10% 논문 비율을 집계해 발표하는 2015 라이덴랭킹에서는 국내 1인 포스텍이 세계에선 219위에 불과했다. 이어 KAIST가 285위, 이화여대가 446위, GIST가 449위에 올랐으며 서울대는 544위에 불과했다.

그 밖에 양적인 성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질적 평가 결과는 다양한 지표로 확인된다. 지난해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공개한 '2015년도 과학기술 혁신역량 평가'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종합 지수에서 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5위를 차지했다. 2014년 7위에서 2계단 뛰어오른 것이다. 연구원 수와 연구개발(R&D) 투자 등 양적인 투입에 힘입은 결과. 하지만 질적 성과 지표로 볼 수 있는 기업 간 기술 협력(22위), 과학인용색인(SCI) 논문 피인용도(29위), R&D 투자 대비 기술 수출(26위) 등은 하위권이었다. 

<키는 정부가 쥐고 있다>
이들 대학은 "산업과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되는 연구성과가 많이 창출되기 위해서는 연구자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며 "정부의 연구업적 평가 시스템이 대폭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분야 연구자들은 연구비의 60~80%를 정부의 R&D예산 지원에 의존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논문 수와 같은 양적 평가로 과제를 선정하고 2~3년 안에 실적을 요구하는 평가 시스템 아래서는 과학기술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획기적인 연구 성과는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연구과제 및 업적을 평가할 때 전문가 집단에 의한 정성평가를 전면 도입할 것, 연구과제 및 업적 평가 시 공정성을 이유로 정작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을 평가자 풀에서 배제해 평가의 전문성, 신뢰성을 떨어뜨리지 말 것을 요청했다. 또 연구과제 수행의 성공여부를 판정할 때 정량적 목표 도달 여부보다 연구주제가 모험적이고 도전적인지, 성실하게 연구를 수행했는지 등과 같은 정성평가가 높게 반영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국 "연구풍토를 바꾸기 위해 대학 내 업적평가 시스템부터 선도적으로 개선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연구개발 재원의 상당부분을 정부에서 부담하고 있고, 개별 연구자들이 연구개발 재원의 상당 부분을 정부 연구비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정부의 공동노력을 촉구했다.

정부의 연구평가 방식이 연구풍토를 바꿀 수 있는 힘은 엄청난 정부지원금의 규모에서 나온다. 지난해 김태년(새정치) 의원이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받은 대학 연구비 자료에 의하면 중앙정부와 산하기관들이 대학에 지원한 연구비는 3조9744억원으로 4년제대학 집행한 총 연구비 5조3147억원의 74.8%에 달했다.

대학별로는 서울대가 4585억7200만원으로 가장 많이 받았고 뒤를 이어 ▲연세대 2365억2200만원 ▲고려대 1914억1000만원 ▲성균관대 1729억5900만원 ▲KAIST 1565억2300만원 ▲한양대 1546억5700만원 ▲경북대 1265억9700만원 ▲부산대 1181억1000만원 ▲포스텍 893억3600만원 ▲경희대 866억1900만원으로 상위 10개 대학에 포함됐다. 서울대의 경우 정부 연구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80%가 넘는다.

대학들의 성명서에 대해 한국연구재단 안화용 기초연구총괄실장은 “대학이 스스로 위기의식을 갖고 자신을 냉정히 평가하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매우 긍정적인 신호”라면서 “미래부와 연구재단은 최근 10년 이상 장기연구가 가능하도록 하는 연구지원 사업을 마련했으며, 평가방식도 수치화된 연구목표의 달성 여부보다 한 두개 대표적인 성과를 질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자성 촉발한 서울대 자연대 세계석학평가>
지난 9일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자연과학 분야의 세계 석학 12명은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을 평가한 보고서에서 “젊은 연구진이 '선구자'가 아니라 '추종자'에 머무르고 있다며 이대로라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석학들은 양적인 성장을 높이 평가했지만 서울대가 처한 한계도 정확하게 지적했다.

보고서는 5개 대학이 성명서에 지적한 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팀 헌트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는 총평에서 “교수들이 어떤 방식으로 평가 받고 그 가치를 인정 받는지도 문제인데, 영향력 높은 유명 학술지에 가능한 많은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는 압박이 젊은 연구자들을 인기 있는 연구로만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석학들은 또 “교수들이 정년보장 심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모험적인 연구를 피하고 대신 단기 실적 쌓기에 치중하고 있다”면서 “교수들은 자기 논문이 많이 인용되게 하려고 이미 많은 이들이 연구하는 분야에 뛰어드는 ‘따라 하기(me-too science)’를 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양적 평가에 좌절하고 있는 서울대 교수들의 심정도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 수학과의 한 교수는 “교수들은 ‘살아남기 위해’ 작은 논문을 최대한 많이 쓴다”면서 “크고 중요한 연구를 해야 필즈상을 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런 연구를 시작했다간 목표에 이르기도 전에 해고를 당하고 말 것”이라고 푸념했다.

실제 서울대뿐 아니라 대부분 국내 대학은 교수업적평가에서 연구 논문의 게재 편수를 가장 중시한다. 이공계의 경우 SCI급 논문 수, 인문사회계의 경우 한국연구재단 등재(후보)지 게재 건수로 평가 받는다. 교수업적평가 결과는 승진과 재임용, 정년보장 등의 인사자료로 활용된다.

보고서는 “현행 교수업적평가 방법으로 개별 연구자를 평가하는 것은 비건설적”이라며 서울대에 교수업적평가 방법의 개선을 권고했다. 특정 학술지 게재와 발표 논문 수 등 기존 정량평가 방식으로는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하는 연구 문화를 만들어 모험적인 연구에 도전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평가단은 미국이나 일본처럼 교수와 학과 평가 시스템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며, 그 방법으로 외부 전문가 견해, 학과 자체 판단 등 다양한 연구문화 변화의 방안을 제시했다.

해외 대학들은 동료평가나 외부평가를 중시한다. 미국대학은 공통적으로 후보자의 논문을 외부평가를 통해 질적으로 평가한다. 동료평가는 해당 학문분야의 전문가들이 평가 대상자의 연구물을 심사하는 것으로 해당 학문분야 발전에 기여한 영향력 등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잣대다. 임용 또는 승진 후보자는 동료평가를 통해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 중 한 명이며, 연구업적이 매우 영향력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일본 역시 교수의 업적평가가 동료 평가자에게 맡겨져 있다. 평가 시에는 연구논문의 질과 연구자의 장래성이 더욱 중시된다.

<한국판 샌프란시스코 선언...늦었지만 '기대'>
이번 5개 대학 성명은 질보다 양에 매몰된 국내 이공계에 자성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한국판 '샌프란시스코 선언'으로 비유된다. 이우일 서울대 연구부총장은 "이번 선언은 샌프란시스코 선언의 한국판"이라며 "우수한 연구 성과가 많이 나오도록 이번에 평가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13년 샌프란시스코에는 각국의 과학자 155명과 과학단체 78곳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연구자들의 연구비지원, 고용, 승진 등에 '저널 인용지수(Journal Impact Factor)'를 사용하지 말자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선언서 서명에는 저명한 과학자들은 물론 미국과학진흥협회(AAAS)를 비롯해 쟁쟁한 학회, 학술단체, 학술저널, 연구지원기관, 편집인단체가 참여했다.

당시 논란의 핵심은 특정 학술기관이 발표하는 참고 수치에 불과한 인용지수가 각종 연구 평가에 관행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 인용지수는 어떤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의 평균 피인용 횟수를 의미한다. 과학자들은 정작 연구의 질적 평가보다 인용지수가 우선시되는 주객의 전도가 일어나고 있다는 데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선언서는 "저널 인용지수가 편향적이며 다양한 학문 분야별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으며, 해당 저널의 편집 정책에 의해 조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저널 인용지수를 계산하는 데 사용된 데이터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삼았다. 상업적 이용 가능성을 경계한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언서는 "연구비 지원과 임명, 승진 심사 때 저널 인용지수와 같은 저널 기반 계량 수치의 사용을 없앨 필요성이 있다"며 "연구 그 자체의 우수함에 기초한 연구평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번 5개 대학 선언은 세계 과학자들이 이미 3년 전에 같은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자성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 대학과 정부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과학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2015 라이덴 랭킹 종합 순위
세계
순위
국내
순위
대학명 국가 인용 빈도 상위 10% 논문비율 2010~13
논문수
1 - MIT 미국 24.8 10040
2 - 하버드대 미국 22.1 31137
3 - 스탠포드대 미국 21.9 14102
4 - UC버클리 미국 21.8 11804
5 - 프린스턴대 미국 21.5 5175
6 - 칼텍 미국 21.4 5097
7 - UC산타바바라 미국 20.3 4258
8 - UC샌프란시스코 미국 19.8 10199
9 - 라이스대 미국 19.1 2433
10 -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 이스라엘 19 2414
11 - 런던위생열대의학대학원 영국 19 1724
12 - UC산타크루즈 미국 18.6 1971
13 - 예일대 미국 18.5 10331
14 - 텍사스대 사우스웨스턴의학센터 미국 18.4 4235
15 - 로잔 공대 스위스 18.2 5015
16 - UC샌디에고 미국 18.1 11707
17 - 옥스퍼드대 영국 17.8 12935
18 - 시카고대 미국 17.6 7043
19 - 콜롬비아대 미국 17.5 11807
20 - UCLA 미국 17.4 14002
219 1 포스텍 한국 11.2 3082
285 2 KAIST 한국 10.4 5048
446 3 이화여대 한국 8.6 1854
449 4 GIST대학 한국 8.5 1391
544 5 서울대 한국 7.4 13249
554 6 KIST대학 한국 7.3 1488
562 7 성균관대 한국 7.2 5874
599 8 울산대 한국 6.6 3231
604 9 경희대 한국 6.5 4358
614 10 인하대 한국 6.4 2586
618 11 한양대 한국 6.4 4482
627 12 고려대 한국 6.2 5948
631 13 경상대 한국 6.1 1687
644 14 연세대 한국 5.9 8194
645 15 충북대 한국 5.9 1208
650 16 전북대 한국 5.8 2350
651 17 부경대 한국 5.8 1122
660 18 영남대 한국 5.7 1599
694 19 경북대 한국 5.2 3010
699 20 강원대 한국 4.9 1397
705 21 충남대 한국 4.8 2013
707 22 서강대 한국 4.8 1167
708 23 부산대 한국 4.7 3428
709 24 전남대 한국 4.7 2855
712 25 아주대 한국 4.7 1651
716 26 건국대 한국 4.6 2368
720 27 중앙대 한국 4.5 2125
725 28 단국대 한국 4.3 1192
730 29 가톨릭대 한국 4.2 2837
739 30 인제대 한국 3.9 1219
*출처=CWTS Leiden Ra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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