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시론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민이 있었다.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고교 선생인 나에게 교육시론을 쓴다는 것은 좀 부담스럽고 거창한 느낌의 일이다. 시론을 떠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필자에겐 너무나 특별하고 감격스러워 평생 잊지 못할 ‘스승의 날 선물’이 있다. ‘담임, 1인 관객을 위한 4팀의 밴드 공연’이 바로 그것이다. 담임을 하던 어느 해 스승의 날 아침이었다. 학급회장이 교무실까지 찾아와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학급회장을 따라 도착한 곳은 교실이 아닌 밴드연습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6인조 밴드가 환한 얼굴과 함께 힘찬 연주로 맞았다. 연주곡은 ‘스승의 은혜’가 아닌 유명 록 가수의 기분 편한 노래였다. 다 같이 어우러져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다 보니 밴드연습실은 어느새 ‘록 스피릿’ 충만한 콘서트장이 됐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어 새로운 멤버의 밴드, 그 뒤로 또 새로운 멤버, 그 뒤에 또 새로운 멤버가 차례로 연주를 이어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 반 24명 모두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날의 공연에 참여한 것이다. 공부하기도 바쁜데 언제 이렇게 공연을 다 준비했을까! 공연을 만들어 준 아이들의 그 따뜻한 마음과 소중한 연습 시간을 생각하니 격한 감격으로 콧날이 시큰했다. 살면서 본 가장 멋진 공연이자, 여태껏 받아 본 선물 중에 최고로 값진 것이었다. 덕분에 난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참 행복한 선생이 됐다.

조계성 하나고 교장
조계성 하나고 교장

훗날 다른 학교 선생님에게 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선생님은 예술고교도 아닌 인문계 고교에서 어떻게 한 반에 밴드가 4팀이나 만들어지냐며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사실 보컬, 드럼, 건반, 기타, 베이스를 연주할 수 있는 학생이 한 반에 4~5명씩은 각각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 그런 반응을 당연했다. 이 어려운 일을 우리 반 아이들이 뚝딱해낸 것이다.

사실 우리 학교에서는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이, 학생들 각자가 악기 하나는 즐길 수준의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어 시시때때로 친구들끼리 밴드를 만들고 자유공연을 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우리 학교의 대표 교육프로그램인 1인2기 수업(1악기&1운동)이다. 우리 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체육종목 1개와 예술종목 1개씩을 필수 선택해 매일 90분씩 교습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악기 연주는 학생들의 일상이 되고 연주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는다. 학교는 학생들이 연주 실력을 맘껏 뽐낼 수 있도록 1인2기 발표회, 정기연주회, 동아리발표회, 햇살마당 버스킹, 축제전야제공연, 졸업공연 등 다양한 공연 기회를 만들어 준다. 이렇게 공연 프로그램이 많다 보니 학생들은 1년에 몇 차례씩 무대에 서게 된다.

혹자는 대입을 위해 공부만 해도 부족한 고교 시절에 체육예술 활동으로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수도 있겠다. 사실 우리 학교도 개교 초기에는 대학입시에 전념할 수 있도록 1인2기 수업을 줄여 달라는 학부모들의 요구가 거셌던 적이 있었다. 이에 학교는 교사와 학부모가 한 자리에 모여 허심탄회하게 토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오랜 시간 이어진 토론을 통해 우리 교사와 학부모들은 공감과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결론은 이렇다. “우리 아이들은 시험 선수가 아닌 창의적 미래인재로 커 나가게, 또 우리 학교는 입시명문이 아닌 진정한 세계적 명문고로 성장하게 모든 교육 역량과 노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체육예술 수업은 그 초석이다. 1인2기 수업 축소는 절대로 안 된다.” 그 사건 이후 우리 학교에서 더 이상 1인2기 논쟁은 없다.

그렇다. 체육예술 교육은 아이들의 체력을 튼튼히 하고 예술적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며 실질적 학업 증진에도 큰 역할을 한다. 1인2기 체육예술 수업이 우리 학생들의 성장과 학업 증진에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학교에서 직접 보고 느낀 점을 정리해본다.

첫째, 체육예술 수업으로 길러지는 강인한 체력과 안정된 정서는 오랜 시간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기본 힘이다. 결국 끈기를 가지고 오래 집중하는 학생이 좋은 성적과 좋은 결과를 얻는다.

둘째, 긍정적 자아감과 성취감이 건강한 학습 동기로 이어진다. 열심히 준비한 공연을 무대 위에 올렸을 때 관객은 뜨거운 관심과 박수로 보답한다. 이 순간 무대 위에 선 아이들은 주인공으로서의 주체적 자아와 환희를 경험한다. 이런 경험은 수업 시간이나 토론 시간에도 적극적 발표자로 나서게 하는 동인이 될 수 있다. 모든 학교가 강의식 수업을 탈피해 토론이나 발표, 프로젝트 수업으로 바꿔 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공연 경험이 많고 발표와 토론식 수업에 익숙한 우리 학교 아이들은 고교 졸업 후 대학에서 더더욱 좋은 성과를 낸다.

셋째, 자기 주도적 기획력과 창의적 문제해결력이 길러진다. 단순히 숟가락을 얻는 행위로는 무대 위에 설 수 없다. 멋진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판도 짜야 하고 구체적인 각자의 역할도 적극적으로 고민하면서 세밀하게 다듬어가야 한다. 때론 팀 내에 문제가 생겨 서로 힘들어지기도 하지만 이 또한 문제해결의 과정이다. 결국 이렇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얻는 성취감은 자발적 학습 태도로도 이어진다. 강요나 강제된 공부가 아닌 스스로 기획하고 실천하는 공부인 만큼 좋은 학업 성취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넷째, 협력과 배려, 양보의 가치를 체득한다. 합주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모니다. 나 혼자만 잘한다고 해서 좋은 공연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서로를 채워주는 노력의 과정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양보와 배려의 가치를 경험한다. 이미 세상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 학문의 영역 또한 그 변화와 발전이 너무 크고 빨라 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조그만 성과도 내기 힘든 세상이다. 협력과 배려의 인성을 갖추지 않고서는 미래에 결코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없다.

우리 학교 학생의 짧은 이야기가 훨씬 더 살아있는 느낌을 줄듯해 소개한다.  “‘저는 ㅇㅇ밴드 리드 기타 ㅇㅇㅇ입니다’ 나빠진 성적으로 한없이 떨어질 뻔한 제 자존감을 지켜준 말입니다. 1인2기 수업으로 기타를 친다는 것, 농구를 한다는 것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중요한 특징이 됐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마음을 맞춰 합주하며 한 곡씩 완성해내고, 체육관에서 서로 패스하며 슛을 성공시킬 때면 큰 성취감과 함께 무척 즐거웠습니다. 그러한 성취는 협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됐습니다. 마침내 기타를 들고 무대 위에 섰을 때는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모두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인정받는 경험은 더 이상 주눅 든 내가 아닌 내 삶을 만들어가는 힘찬 주인공으로서 나를 느끼게 해줬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고교 선생이다. 우리 공교육은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할 책임이 있다. 갈수록 정시가 확대되고 내신이 강조되는 대학입시 환경에서 우리나라 체육예술 교육의 입지가 자칫 줄지 않을까 걱정이다. 우리나라 고교치고 대학입시에서 자유로운 학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갈 힘과 더 큰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 모두를 키우는 교육, 1인2기와 같은 체육예술 교육이 전국적으로 더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최소한 악기 하나는 즐기면서 백세 인생을 살도록! 그렇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본 기사는 교육신문 베리타스알파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일부 게재 시 출처를 밝히거나 링크를 달아주시고 사진 도표 기사전문 게재 시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저작권자 © 베리타스알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