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것 같지 않던 코비드-19 팬데믹의 출구가 마침내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두기가 차츰 풀리면서 대학을 포함한 각급 학교들도 대면 수업 체제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아직 완전히 끝나진 않았지만 한바탕 몰아쳤던 거센 폭풍이 점점 잦아들고 있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학생들의 모습이 점점 많아지는 캠퍼스를 보면서 잠깐 생각해본다. 팬데믹은 우리 사회에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 현장에 무슨 교훈을 남겼을까?

지난 2년 팬데믹이 몰아치면서 각급학교는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라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학교의 문을 닫고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의 화면 앞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이른바 비대면 수업이 정착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으나, 정보통신이 발전한 나라답게 차츰 화면으로 학생들과 마주하는 현실에 그런대로 익숙해졌다. 거의 2년 반 동안 진행된 비대면 교육은 새삼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김동택 서강대 입학처장(글로벌한국학과 교수)
김동택 서강대 입학처장(글로벌한국학과 교수)

학생들은 비대면으로 진행된 강의 이외에는 거의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다. 강의, 시험, 평가, 학점, 학위는 학교의 핵심적인 기능의 일부였기에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학생들은 집에서 카페에서 화면으로 수업을 듣는 것이 편리할지는 몰라도 동기들, 선후배들과 만남에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안 그래도 활발하지 못하던 학생회 활동은 거의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학교 생활의 한 축을 차지하는 동아리는 물론이고 교수들과 이루어지는 학과의 다양한 활동들도 거의 멈추었다. 봉사활동, 동아리활동, 다양한 진로 체험, 학회, 학생회 활동 모두가 거리두기로 인해 중단됐다. 강의를 하는 나도 학생들에게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긴 했지만 학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이야기를 거의 나눌 기회가 없었다. 형식적이나마 학생회는 구성되었으나 온라인으로 이뤄지는 소통은 어려웠고 동아리 활동은 진행되었으나 정작 동아리 활동을 진행할 집행부는 서로 담당하기를 싫어했다. 팬데믹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진단할 수는 없지만, 하고 싶은 것은 하지만 그것을 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수적인 일은 정작 하기 싫어하는 현상은 우리 교육 현장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교육을 담당하는 제도로서 학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굳이 선택할 문제는 아니지만 교과와 비교과 즉 지식의 습득과 사람들이 서로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경험을 쌓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흔히 팬데믹이 학업 능력의 양극화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지식을 쌓는 부분은 학원이든 다른 온라인 강좌든,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되는 사람들은 들어서 해결했을 것이며 그런 환경이 갖춰지지 못한 학생들은 못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년에 맞는 지식만 갖추고 정작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서로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해결해가는 방법을 경험해보지 못한 학생들은 나중에 사람들과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해결할까? 학력의 양극화도 공교육이 해결해야 할 큰 과제이지만, 교육자로서 더 걱정되는 부분은 이렇게 졸업한 학생들이 만들어갈 사회의 모습이다. 지난 2년간의 경험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세계적으로 경험한 일이었다는 점에서 인류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의 욕구와 그것을 실현해 줄 지적 역량을 가졌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법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갈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불평등을 개인들의 능력 문제로 돌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소통하는 법을 몰라 갈등의 정도가 높아지는 사회, 소위 4차산업혁명의 수혜자로서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갖추고 많은 보상을 받는 소수의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다양한 차원에서 나타나는 양극화와 그로부터 발생한 사회적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유엔은 지구촌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으로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팬데믹은 지구촌이 과연 지속가능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주었다. 팬데믹에 대한 처방으로 제시된 거리두기와 유사하게 여러 나라들도 자국을 지키기 위해 국경을 걸어 잠궜다. 잘 사는 나라들은 백신을 확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자국민들이 수 차례에 걸쳐 맞을 수 있는 분량을 확보한 반면 못 사는 나라들은 백신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잘 사는 나라들이 팬데믹으로부터 안전하게 되었던가? 백신을 맞지 못한 나라들에서 다양한 변종들이 계속해서 발생했고 그것은 다시 잘사는 나라들로 전파돼 지구촌은 끊임없는 악순환에 빠져들게됐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보았을 때, 팬데믹 상황이 발생하면 백신을 개발할 기술력이 있다고 해도 그리고 백신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하다고 해도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지식을 아무리 가르쳐도, 그런 지식으로 백신을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진다 해도 팬데믹이라는 위험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지구촌 사회가 지속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할 지에 대해 다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달리 생각해보면 팬데믹 자체가 지식과 지식으로 인해 가능해진 기술, 그리고 그 기술로부터 얻을 수 있는 부를 무한정 추구해 결국 지구촌 생태계를 파괴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대학은 펜데믹으로 인해 다시금 깨닫게 된 평범한 상식을 마주해야 한다. 즉 교육을 담당하는 제도로서 대학은 그리고 학교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더불어 같이 사는 법, 지속가능한 삶과 사회에 대해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꽃들이 피어나고 잎들이 색을 더해가는 캠퍼스를 보면서, 얼른 학생들을 만나 공부도 하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껴야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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