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의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이 쓴 요재지이(僥齋志異)에 수록된 시험에 관한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 선비가 과거시험 공부에 최선을 다했지만 노인이 될 때까지 계속 낙방해 가세가 기울고 살기 어렵게 됐다. 그런데, 자기보다 실력이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버젓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보니 억울한 마음이 들어 옥황상제에게 "공정하지 못함"을 따졌다. 이에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을 불러 이들의 술 마시기 시합으로 시비를 가리자고 했다. 만약 정의의 신이 술을 더 많이 마시면 선비의 주장이 맞고, 운명의 신이 더 많이 마시면 선비의 상황을 세상의 이치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시합의 결과 정의의 신은 세 잔을 마셨고, 운명의 신은 일곱 잔을 마셔 운명의 신이 승리했다. 즉, 운칠기삼은 일의 성패가 70%의 운과 30%의 재주(혹은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운칠기삼이 주는 무기력함을 피하고자 한다면 운삼기칠로 바꾸어도 좋지만, 그렇다 해도 이 얘기의 핵심은 달라지지 않는다. 

김근영 지스트 입학학생처장(물리광과학과 교수)
김근영 지스트 입학학생처장(물리광과학과 교수)

약 350년 전 선비의 질문과 옥황상제의 답은 (그전에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예로 오늘날 한국의 대학입시 결과는 운칠기삼인가? 질문을 조금 바꾸어서, 대학입시의 결과는 전적으로 학생의 노력과 능력만의 결과인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통계와 분석을 통해 계속 보고되고 있다. 특히, 학생부 위주 전형이든, 수학능력시험 위주 전형이든 나름의 이유로 대학 입시 결과는 학생의 가정환경과 집안의 경제력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험결과에 있어 외부적인 요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학생의 타고난 재능이다. 타고난 재능은 유전이고 우연적이며 이것은 학생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운이다. 필자는 어떤 일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타고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아무리 좋은 가정환경에서 최고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마이클 조던처럼 농구를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능은 하나가 아니다. 예술, 체육 등의 재능이 학문의 재능과 다르다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그런데, 학문에도 다양한 재능이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히 문과/이과를 구분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다. 필자가 연구하고 있는 물리학이라는 학문 하나만 보아도 분야와 연구 주제에 따라 필요한 재능이 다양하고 물리학자들의 스타일은 다채롭다. 이것은 축구 선수들의 스타일에 비유할 수 있다. 축구 선수들을 보면 개인기가 화려한 창조적인 공격수가 있고 정석에 입각해 단단하고 확실한 플레이를 하는 공격수가 있다. 공격수 뿐만 아니라 미드필더, 수비수, 골키퍼들도 각자의 재능을 극대화해 나름의 성공적인 스타일을 구축해 간다. 물리학자도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할 수 있는 학생들의 재능을 한국의 입시 제도가 잘 읽어낼 수 있을까?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학문적 재능과 성취를 "평균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다양성보다는 보편성이 목적이 되는 시험이다. 즉, "적절한" 수준의 논리력, 암기력, 분석력, 성실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은 학생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기에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수능시험의 성적 순서로만 간단히 학생 재능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학생의 재능은 다양하며 어떤 시험으로 측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것이다. 오늘날 수능에 최적화된 재능이 지난날 학력고사에는 최적화되지 않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수능을 본다면 최상위의 성적을 얻지 못할 수 있다.

학생부 위주 전형이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을 반영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학생부가 입시에 사용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기록이라기보다는 보이기 위한 기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대학의 전형위원들에게는 짧은 시간 동안 학생들의 서류를 보고 그 진실성과 가치를 판단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모든 서류가 진실하다 하더라도 전형위원들의 경험과 주관에 따라 평가 결과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입시제도는 모든 학생의 다양한 재능을 정확히 판단하기에는 본질적으로 부정확하다. 그런데, 이런 제도를 이용해 학생들을 "0.01점" 차이로 줄을 세워 선발한다는 것이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러한 과도한 "공정함"이 오히려 불공정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은 영점 조정이 안 된 흐릿한 자로 학생들을 "재단"하며, 사회는 서열화된 대학에 맞추어 학생들을 줄 세운다. 이 줄은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과 잠재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며 사회적 갈등과 불평등의 시작이 된다. 이 상황을 좀 더 개선할 수 있을까?

입시제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역이용"하는 것이 해볼 만한 시도가 될 수 있다.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책에서 추첨을 통한 대학입학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대학이 정원보다 충분히 많은 합격 후보군을 선정한 후 추첨을 통해서 최종 합격생을 결정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정원보다 많은 후보자를 선정하는 것은 능력이 부족한 학생에게 "불공정"하게 기회를 준다는 뜻인가? 아니다. 입시제도의 근본적인 부정확성을 인정하고, 최소한의 능력 기준을 통과한 합격 후보군을 넉넉하게 선정하는 것이 오히려 더 공정하다고 할 수 있다.

선정된 후보군에서 최종합격자를 추첨으로 결정하는 것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학생들이 초, 중, 고 생활을 좀 더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보낼 수 있어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생각과 행동을 입시제도의 틀에 맞춰 조금이라도 더 높은 점수를 얻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는 기계적이고 소모적인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둘째, 추첨의 무작위성은 학연에 얽혀있는 특권 의식과 패배 의식을 희석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세상의 이치가 운칠기삼이라는 것을 되새기며, 성공에 겸손하게 되고 실패에 좌절하지 않으며 다른 이들과 공존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샌델 교수가 제안한 추첨제가 한국에서 시행될 수 있을까? 독자들이 이미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이유들 때문에 아마 시행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논의는 계속되고 아이디어는 공유되어야 한다. 그것이 기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제도는 바뀌지 않더라도 사람의 마음가짐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교육신문 베리타스알파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일부 게재 시 출처를 밝히거나 링크를 달아주시고 사진 도표 기사전문 게재 시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저작권자 © 베리타스알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