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루스 파울루스 루벤스 ‘평화의 체결’

-페트루스 파울루스 루벤스 ‘평화의 체결’

박물관은 소중한 것을 보존하고 전시하고 연구하는 다양한 공간, 혹은 기관들이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다. 전적으로 전통적인 왕가나 권력층의 컬렉션에 바탕을 두었던 이탈리아나 독일과 비교하면 프랑스 박물관은 탄생부터 독특하다. 구체제를 송두리채 뒤엎는 대혁명이 그 기원이기 때문이다. 루브르 박물관은 국고에 귀속시킨 왕가의 컬렉션, 성직자들과 망명자들로부터 몰수한 재산, 군사 정복에 따른 전리품으로 1793년 8월 10일 문을 연다. 1년 전의 왕정폐지 기념 축제에 맞추어 개관된 박물관은 특권층의 소유였던 예술작품이 이제는 프랑스 국민의 것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은 파괴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구체제의 잔재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혁명기에 필요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루브르에서 왕의 컬렉션을 중심으로 박물관이 열린 만큼 루브르가 탄생되기까지는 뜨거운 논쟁과 혁신적인 조처들이 연이어 단행되었다.

무엇보다도 왕가의 컬렉션과 몰수된 전국의 교회재산, 또 전리품으로 막 프랑스에 도착한 다양한 작품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벨기에에서 가져온 루벤스(1577-1640)의 ‘십자가에서 내림’(1612-1614)과 같은 가톨릭적인 주제의 그림 및,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1622-1625) 연작은 좋은 예가 된다. 광신의 위험이 있는 가톨릭 신앙 대신 이성을 최고의 존재로 숭배하려고 했던 혁명 정부로서는 종교화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더불어 왕과 왕족의 권력과 영광을 찬미하는 그림은 왕당파의 복고 정서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이런 류의 작품이 공화국의 정당성을 보여주려는 전시에 합당한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이때 등장한 논리가 ‘탈맥락화 décontextualisation’이다. 1792년 8월 22일, 캉봉(Cambon, 1756-1820)의원은 « 박물관은 작품들을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맥락으로부터 분리시켜 순수하게 예술적인 가치로 보게 함으로써 그들을 보호하는 일종의 피난처 »가 된다고 했다. 박물관은 모든 현실적인 맥락을 무효화시키는 ‘중립적인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라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연작 중, ‘앙굴렘 조약’과 ‘평화의 체결’ 두 작품은 혁명적인 그림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앙리 4세의 미망인이었던 마리 드 메디치는 아들 루이 13세와의 불화를 끝내고 파리로 돌아온 1621년, 루벤스에게 자신의 일대기를 그려 달라고 주문한다. 섭정 후 권력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것을 감추고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유럽 최고의 화가였던 루벤스는 조수와 제자들을 총동원하여 3년만에 24개에 이르는 작품을 완성하였다. 전시 공간을 고려하여 가로는 1미터에서 3미터 정도이고, 7미터가 넘는 대작도 세 작품이나 된다. 세로는 모두 4미터에 가까운 큰 크기다.

연작은 마리 드 메디치가 태어나기 전, 세 명의 파르카(생사를 관장하는 세 여신)가 운명의 실을 잣는 장면부터 루이 13세와의 완전한 화해에 이르는 여정을 화려하고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앙리 4세는 제우스의 모습으로, 마리 드 메디치는 헤라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헤르메스와 아폴로 등의 신들의 호위 속에 역경을 딛고 승리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평화의 체결’(1623-1625)은 연작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눈을 가린 채 무차별로 뱀을 휘두르는 인물은 맹목적인 분노로 보인다. 보르게세 컬렉션이었던 ‘전사’(기원전 100년경, 루브르)의 자세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오른쪽 뒤에는 양손으로 뱀을 잡은 채 입에 물고 있는 남자가 있다. 질투를 나타낸 듯하다. 그의 뒤로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고, 바로 앞에는 가면을 이마에 걸친 여인이 횃불을 평화의 여신에게 들이댄다. 악의 위협에도 하얀 드레스를 입은 평화의 여신은 전혀 흔들림이 없이, 무기를 불태우며 전쟁이 종결되었음을 알린다. 헤르메스는 마리 드 메디치를 평화의 전당으로 안내하고 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카두세우스(헤르메스가 들고 다니는 지팡이로, 싸움을 중단한 뱀 두 마리가 휘감고 있다.)는 평화의 신으로서의 헤르메스를 나타낸다.

‘평화의 체결’은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라는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봉건적 폐단을 딛고 승리를 쟁취하는 공화국의 이미지로 해석되면서 받아들여졌다. 가다머(Gadamer, 1900-2002)는 박물관은 소장품의 역사를 은폐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이 삶의 모든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는, ‘대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부응하는 것”이 바로 박물관 설립이다. 이러한 탈맥락화는 공화정신과 양립하지 않는 작품들을 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는 뛰어난 논리가 된다. 작품들은 화파별, 연대별로 전시됨으로써 원래의 맥락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의미된 것에서 의미하기로의 변형은 화파와 연대기에 따른 전시에 의해 컬렉션을 배열하고 박물관에 옮겨놓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역사적인 구체적인 맥락 안에 놓여 있는 예술작품이 파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여 공화국과 자유, 계몽주의의 승리의 새로운 역사를 쓰겠다는 이중의 의도에 의해 구체화되어 갔다.

연작은 마리 드 메디치가 고향인 피렌체 양식으로 지은 뤽상부르 궁전(현재는 상원의회 의사당. 그림이 전시되었던 방은 방명록의 방이 되었다.)에 오랫동안 있었다. 르 브룅은 이에 영감을 받아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을 만들었고, 18세기의 와토, 자크 루이 다비드도 영향을 받는다. 그림은 혁명 때 몰수되었다가, 1815년에 상원의회에 다시 팔린 뒤, 일년 후 루브르로 옮겨졌다. 루브르를 드나들며 거장의 그림을 모작하던 들라크루아에게도 루벤스는 최고의 스승이었다. 1980년대에 새롭게 단장한 큰 전시실에서 천창을 통해 환하게 빛이 들어오는 가운데 마리 드 메디치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추앙되고 있다. 연작의 결말과는 달리 결국 루이 13세와의 불화로 프랑스를 떠나 독일 쾰른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걸 생각하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정연복 편집위원 www.facebook.com/yeonbok.jeong.75

페트루스 파울루스 루벤스(Petrus Paulus Rubens, 1577-1640), '평화의 체결 La Conclusion de la paix, à Anvers, le 10 août 1620,’(1622-1625, 캔버스에 유채, 394X29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선명한 화질의 그림으로 직접 가기:

https://fr.wikipedia.org/wiki/Cycle_de_Marie_de_M%C3%A9dicis#/media/Fichier:Peter_Paul_Rubens_04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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