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복의 미술관노트]신화에서 위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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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복의 미술관노트]신화에서 위안을
  • 베리타스알파
  • 승인 2019.09.1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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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에우로파의 수욕(受辱)’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별의별 짓을 다 한다. 둔갑은 기본이고 속임수와 납치도 거침이 없다. 신화를 실제로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고 흥분할 일은 아니지만 박물관에서 마주치는 이런 주제는 관람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신화적인 상상력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간절히 바라는 일뿐만 아니라 원초적인 두려움과 공포,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참혹한 일들이 다 가능하다. 그 중에서도 에우로파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도기와 테라코타에도 자주 등장하고, 폼페이 벽화에서도 보인다.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화가들의 영감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시대와 화가에 따라 분위기는 천차만별이다. 부셰(F. Boucher)는 제우스와 에우로파의 만남을 행복한 결합으로 표현한다. 모로(G. Moreau)는 에로틱한 꿈의 한 장면처럼, 보테로(F. Botero)는 황소를 제압하는 듯한 에우로파의 모습을 코믹하게 그린다. 신화의 묘미다.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각도에서 보게 하고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발견하게 해준다. 신화는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티치아노(Tiziano Vecellio)는 에우로파의 공포와 폭력적인 상황에 초점을 둔다. 1562년에 그린 그림이 미국 보스턴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제우스는 해안에서 놀고 있던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파를 보고 바로 욕망에 사로잡힌다. 부인인 헤라의 눈치도 보이고 에우로파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하얀 황소로 둔갑하였다. 순진한 아가씨는 뿔을 꽃으로 장식해주며 놀다 별 생각없이 황소 등에 올라탔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황소가 재빨리 바다로 뛰어들어 엄청난 속도로 내달린 것이다. 도착한 곳은 크레타 섬. 제우스가 나고 자란 곳이다. 둘 사이에 크레타의 전설적인 왕 미노스(Minos)가 태어나고, 그는 그리스의 ‘청동기’인 기원전 2,000년 무렵의 ‘미노아 문명’(Minoan civilization)을 이룬다. 에우로파(Europa)는 크레타의 왕비가 되었고 유럽(Europe) 대륙의 이름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그림은 황소가 바다를 힘차게 가로지르는 순간을 묘사한다. 해안이 제법 멀어보이는 걸로 봐서 꽤 달려온 것 같다. 같이 놀던 친구들은 멀어져 가는 에우로파를 향한 채 두 팔을 흔들며 어쩔 줄 몰라 하는가 하면, 여전히 그들 옆에 있는 다른 소들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본다. 페니키아의 공주는 얼굴을 어깨 뒤로 젖히고 친구들과 놀던 해안가를 바라보며 무력한 호소를 하고 있다. 하얀 옷은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져 있어 몸을 거의 가려주지 못한다. 바람에 휘날리는 불그레한 오렌지 빛의 베일은 노을진 하늘과 함께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만든다. 에우로파의 몸짓에서 다급함이 느껴진다. 한 손으로는 뿔을 붙잡고 두 다리로 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자세히 보면 앞쪽에 흉측하게 생긴 바다 괴물이 있다. 잡아 먹히지 않으려면 황소 등에서 미끄러지지 않아야 한다. 황소는 두려운 대상이지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묘한 상황이다. 그녀와 비슷한 포즈로 놀리듯이 돌고래를 타고 있는 아기 천사는 귀엽다기보다 얄미워 보인다. 어울리지 않게 화관을 쓴 황소의 눈에는 핏발이 서렸다. 제우스의 과한 욕망이 내비친다. 활과 화살을 들고 하늘에 떠있는 어린 에로스들은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장난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70여년 후 루벤스(P. Rubens)는 티치아노가 그린 그림을 모작했는데,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유럽을 자신들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은 오랜 전통의 예술과 문화를 가까이 두고 싶어 하였고, 20세기 초 무렵부터 많은 기업가들이 경쟁적으로 유럽의 예술품을 사 모았다. 조각과 회화, 가구뿐 아니라 수도원이나 저택을 통째로 사오기도 해서 국가에 기증하거나 재단을 만들어 박물관을 열었다. 그 중에서도 뉴욕 출신의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Isabella Stewart Gardner, 1840-1924)는 최초의 여성 컬렉셔너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고대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유럽의 예술품뿐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의 다양한 작품들을 수집하였다. 만점이 넘는 소장품을 토대로 미국인들에게 미적 체험을 제공하고 싶다는 오랜 꿈에 따라 베네치아 양식의 건물을 지어 1903년 일반에 공개하였다. 전시된 작품에는 이사벨라의 뜻에 따라 제목과 설명이 없다. 정보는 한쪽에 비치된 자료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작품을 우선 눈으로 감상하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왕 필리포 2세의 주문으로 그려진 7점의 신화적 주제 중 하나이다. 필리포 5세가 프랑스 대사에게 주었다가 이후 오랫동안 오를레앙 공작 가문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이 그림을 구입한 것은 1896년이다. 그림이 보스턴에 도착한 후 이사벨라는 « 에우로파를 생각하고 그녀에 관해 꿈을 꾸면서 몇 시간씩 앉아있었다 »고 고백했다. 어린 나이의 외아들을 잃자 마자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던 시누이마저 떠나보냈던 자신의 고통을 에우로파에게서 보았던 것일까. 그녀에게 깊은 동정심과 공감을 하면서 동시에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림은 진홍색 벽지와 로코코 양식의 베네치아 가구, 세심하게 배치된 회화들과 잘 어우러져 전시되어 있다. 특히 이사벨라는 그림에 등장하는 아기천사와 똑같이 생긴 청동 조각을 아래에 놓아 두었다. 신화의 파도를 함께 타자고 손짓하는 듯하다.

/정연복 편집위원 www.facebook.com/yeonbok.jeong.75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00-1576), ‘에우로파의 수욕(受辱) The Rape of Europa’ (1562, 캔버스에 유채, 178X205cm,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보스턴)

선명한 화질의 그림으로 직접 가기:

티치아노: https://fr.wikipedia.org/wiki/Le_Viol_d%27Europe_(Titien)#/media/Fichier:Tizian_085.jpg

루벤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c/Rubens_-_El_rapto_de_Europa.jpg

부셰: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Fran%C3%A7ois_Boucher_-_The_Rape_of_Europa_-_WGA02897.jpg

보테로: http://ipaintingsforsale.com/painting/rapto_de_europa-128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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