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후의 클래식LP명반 산책] 사계절의 변화를 절묘하게 묘사한 최초의 표제음악

비발디 : 4계 (The Four Seasons)

6월 중순이 되니 주변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산기슭 전원주택으로 옮겨온 후부터는 유독 여름이 더 좋아졌다. 회색빛의 아파트 대신 초록의 숲과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으니 공기도 더 좋게 느껴지고, 자그마한 텃밭에 심어놓은 상추나 호박, 토마토가 자라는 과정을 매일 지켜보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춥고 어둡고 긴 회색빛 겨울이 물러가고 따스한 봄기운을 느끼고 난 후 맞이한 여름이기에 반갑고 더욱 즐기고 싶다. 실컷 즐기다 더위에 지치거나 지겨워질 때쯤이면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이 찾아올 터이니 그리 아쉽지도 않을 듯하다. 이처럼 어김없이 반복되는 사계절의 경이로움을 음악으로 묘사한 작곡가들이 있다. 하이든은 오스트리아 각 계절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오라토리오 ‘사계(The Seasons)'를 통해 그려냈고, 차이코프스키는 1월부터 12월까지 각 달(月)을 묘사한 12개의 서정적인 피아노곡집을 ’사계(The Seasons)'라는 제명으로 발표했다. 탱고음악을 한 차원 높은 예술로 승화시킨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도 아름답다. 그렇지만 사계절을 소재로 작곡된 음악 중에서는 단연코 비발디의 ‘사계’가 가장 유명하다.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약 150년간의 서양음악을 바로크음악 시기로 분류한다. 수 많은 작곡가들이 활동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음악가는 독일의 바흐와 헨델, 그리고 이탈리아의 코렐리와 비발디였다. 1678년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 바이올리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난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으나 성직자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1703년(25세)에 사제가 되었다. 그렇지만 태어날 때부터 심한 천식으로 고생한 비발디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없이 성직에서 물러나 베네치아의 피에타 소녀고아원의 음악교사가 되었다. 피에타 고아원은 여자 고아나 사생아를 대상으로 음악을 가르치는 자선단체였지만 베네치아 축제나 휴일 행사 때 동원돼 공연할 정도로 연주 수준이 높았고, 특히 베네치아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비발디는 이 고아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근무하면서 자신이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들이나 미사곡들을 학생들을 통해 발표해 베네치아 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비발디는 교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716년(38세) 악장으로 임명된 후 1740년(62세)까지 무려 37년간 피에타고아원의 음악가로 재직하면서 수백 곡의 협주곡과 종교음악을 작곡했으며, 한 때 오페라 작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714년(36세)부터 1718년(40세)까지 4년 간 10편의 오페라를 베네치아에서 공연했고, 대중의 인기를 얻은 그의 오페라들은 유럽 전역에서 상연되어 각지에서 비발디를 초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산마르코 성당의 사제였다. 세속적인 오페라 공연에 빠져 흥행사 같이 행동한 비발디를 못마땅해 한 베네치아 주교를 비롯한 카톨릭 교단의 사제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결국 오페라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한 비발디는 베네치아를 떠나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했다. 그렇지만 빈 오페라극장 책임자 지위를 약속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샤를르 6세(Charles VI, 독일어로는 Karl VI, 1711~1740)는 비발디가 빈에 도착한 시점에서 세상을 떠났고, 빈에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성공을 기대했던 비발디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결국 빈의 빈민촌에서 비참하게 지낸 비발디는 빈에 도착한 지 1년 여 만에 객사했고 빈민들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리고는 200년 가까이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오랜 세월동안 잊혔던 비발디의 작품들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이탈리아 음악학자들을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비발디의 작품 수는 500곡이 넘는 협주곡, 40곡 이상의 오페라와 종교음악 등이 있다.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유명한 클래식음악 중 하나인 ‘사계(The Four Seasons)’는 1725년(47세) 경 작곡한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라는 제목의 12곡의 바이올린협주곡들 중 첫 4곡이다. 제1곡 ‘봄’, 제2곡 ‘여름’, 제3곡 ‘가을’, 제4곡 ‘겨울’ 등으로 소제목을 붙였으며, 4개의 협주곡은 각각 3개의 ‘빠르게-느리게-빠르게’ 악장으로 구성되어있다. 각 악장 마다 작가 미상의 짧은 시(소네트)가 붙어있어 각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사람들의 모습을 절묘하게 음악과 조화시켰다.

제1곡 ‘봄’ (1악장) “새들은 즐겁게 아침을 노래하고 시냇물은 부드럽게 속삭이며 흐른다. ...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와 천둥과 번개가 소란스럽다. 폭풍우가 가라앉고 다시 아늑한 봄의 분위기 속에서 새들이 노래한다.” (2악장) “푸르른 목장에서 목동들이 따뜻한 햇볕아래 강아지와 함께 졸고 있다.” (3악장) “아름다운 요정들이 목동의 피리소리에 맞추어 춤을 춘다.”

제2곡 ‘여름’ (1악장) “무더운 여름, 사람들과 양들 모두 지쳐있다. 뻐꾸기와 산비둘기들이 노래한다. 갑자기 북풍이 몰아치고, 목동은 다가올 폭풍을 걱정한다.” (2악장) “번개와 천둥소리에 목동은 겁을 먹고 파리와 벌들이 미친 듯이 난다.” (3악장) “무서운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내리치며 쏟아지는 우박에 곡식들이 쓰러진다.”

제3곡 ‘가을’ (1악장) “농부들이 춤과 노래로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술잔치를 벌인다.” (2악장) “잔치 후 서늘한 가을밤에 평온하게 잠을 청한다.” (3악장) “이른 아침 사냥꾼들이 개와 함께 사냥을 한다. 짐승들은 도망치고 사냥꾼은 쫓는다.”

제4곡 ‘겨울’ (1악장) “얼어붙은 차가운 겨울, 바람은 매섭고 사람들은 추위에 이가 떨린다.”

(2악장) “바깥은 차가운 비가 내리지만 집안의 난롯가는 따뜻하고 아늑하다.” (3악장) “얼음길에서 넘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걷는다. 미끄러지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나 걷는다. 북풍이 몰아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겨울의 즐거움이다.”

비발디가 음악으로 묘사한 사계절의 풍경은 놀랍도록 충실히 소네트(짧은 시)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자연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표제음악’은 비발디 사후 100년 가까이 흐른 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에서 그 모습을 보였고, 이후 낭만주의 음악가들에 의해 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오랜 세월 동안 잊혀진 ‘사계’는 1950년대에 들어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고, 1959년에 녹음된 ‘이 무지치(I Musici) 합주단’의 연주 음반은 역사상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현재까지 발매된 ‘사계’ 음반은 헤아릴 수없이 많고 모두 제 각기 특색 있는 연주를 펼친다. 하지만 내 귀에는 아직도 ‘이 무지치’의 연주가 가장 정겹게 들린다.

/유재후 편집위원 yoojaehoo56@naver.com

비발디 ‘사계’, 이 무지치(I Musici)

https://www.youtube.com/watch?v=aOr0i1hrV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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