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사티 : 3개의 짐노페디 (Trois Gymnopédies)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위에 우뚝 서있는 하얀 사크레 쾨르 대성당의 왼쪽 편 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화가들의 광장이 나온다. 지금은 주로 초상화를 그리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활동무대지만 19세기 말엔 고흐,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 화가들과 피카소, 로트렉 등 현대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들이 모여 작품 활동을 하던 장소였다. 몽마르트르의 뮤즈라고 불리던 수잔 발라동(1865~1938)은 가난한 세탁부로 일하다 르누아르, 드가, 로트렉 등 대가의 모델이 되어 명화 속에 자신의 모습을 많이 남긴 여성이다. 그림에 재능이 있었던 수잔 발라동은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독학으로 화가의 꿈을 키워갔고, 결국 한 때 연인사이였던 로트렉의 권유로 모델 생활을 중단하고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미술전인 ‘살롱 나쇼날’ 출품 작가로도 활동하던 그녀는 1893년 몽마르트르의 한 카페에서 만난 무명의 음악가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으나 성격차로 인해 6개월 만에 연인생활을 청산했다. 청혼했을 정도로 수잔 발라동을 깊이 사랑했던 무명의 음악가 에릭 사티는 그녀와의 짧지만 격렬했던 연애를 끝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노르망디 지방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옹플뢰르에서 태어난 에릭 사티(1866~1925)는 13세의 어린나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했으나 선생들로부터 ‘재능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휴학했다. 3년 만에 재입학을 하지만 그 이후에도 선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듯하다. 1887년(21세)에 몽마르트르로 거처를 옮기고, 부근의 카바레 ‘샤 누아르(Chat noire, 검은 고양이)’의 피아니스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카바레의 단골 고객이었던 드뷔시 등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기도 하고 틈틈이 피아노 소품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사티는 1898년(32세)에 파리 남쪽 교외의 빈민 지역의 한 술집 2층 구석방으로 옮긴 후 1925년(59세)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에릭 사티의 음악은 독창적이다 못해 독특하고 기괴한 느낌까지 들게 한다. 현실 적응력이 부족한 괴짜로 살아간 그의 인생과도 닮아있다. 그의 음악은 ‘단순성’과 ‘즉흥성’을 특징으로 한다. 복잡하고 현학적이며, 웅변적이고 과다한 감정을 담은 음악들을 싫어한 사티는 당시 음악계의 주류였던 낭만주의 음악이나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다. 그의 피아노곡 대부분은 3분 이내의 짧고 단순한 곡들로 ‘가구음악’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카바레에서 자신의 음악을 경청하고 있는 사람에게 “제 음악은 집중해서 듣는 음악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집 한 구석에 놓여있는 가구처럼 존재감은 없지만 편안함을 주는 음악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에릭 사티의 음악을 뉴에이지 음악이나 BGM(Background Music, 배경음악)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단순함’이 지나쳐 짜증나게 하는 음악도 작곡했다. 1분 20초가량 걸리는 멜로디를 840번 반복하는 곡이다. 제목 또한 ‘벡사시옹(Vexations, 짜증)이다. ‘진지하고 부담스러운’ 자세로 연주하도록 지시되어 있는데 작곡가 자신이 생전에 840번 반복 연주를 해 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곡의 악보를 처음 발견한 미국의 전위작곡가 존 케이지는 1963년 10명의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벡사시옹‘을 초연했다. 840번 반복연주에 걸린 시간은 18시간이 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1995년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총 40여 명의 연주자들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극소수이긴 하지만 끝까지 경청한(?) 청중들도 있었다고 기록돼있다.

에릭 사티의 음악은 동시대의 평론가들이나 청중들에게는 외면당했지만 현대 프랑스 작곡가들 특히 오네게르, 뿔랑, 미요 등 ‘프랑스 6인조(Les six)'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점차 그의 음악관에 동조하는 작곡가들이 늘어났다. “나는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일찍 온 사람이다.”라고 한 그의 말처럼 사후 수십 년이 지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티의 음악들은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괴상한 행동거지, 수잔 발라동과의 짧지만 격렬했던 사랑, 가난과 고독 속에서 지낸 그의 삶을 조명한 연극과 뮤지컬이 공연되고, 대표작 ’그대를 사랑해(Je te veux)'나 ‘3개의 짐노페디’는 TV광고나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그리고 공원이나 백화점 등 공공장소에서 자주 들려주는 ‘가구음악’이 되었다.

‘짐노페디(Gymnopédie)'는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의 젊은이들이 나체로 춤을 추는 종교의식을 의미한다. ‘3곡의 짐노페디(Trois Gymnopédies)’는 사티의 대표적인 피아노곡으로 제1곡 ‘느리고 비통하게’, 제2곡 ‘느리고 슬프게’, 제3곡 ‘느리고 장중하게’ 연주하도록 했다. 3곡 연주시간 합해서 8~9분 정도의 짧고 단순한 곡이다. 반복되는 같은 리듬과 간결한 멜로디가 단조로운 느낌도 들게 하지만 들을수록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집중해서 감상하지 않아도 친근한 멜로디가 쉽게 귀에 들어온다. 라디오나 TV 혹은 공공장소에서 이따금씩 들려오는 ‘짐노페디’는 오래되었지만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거실 한 구석의 ‘잘 만든 가구’처럼 언제나 정겹게 들린다. 한동안 외면당했던 그의 피아노곡들이기에 정통 클래식 피아니스트들이 남긴 음반은 많지 않다. 책을 읽을 때나 글을 쓰면서 흘려들을 수 있는 배경음악이 필요할 때 찾게 되는 음반은 나폴리 태생의 알도 치콜리니(Aldo Ciccolini)가 녹음한 6장의 LP로 구성된 사티의 피아노곡 전집 앨범이다. 한 때 ‘사티의 스페셜리스트’로 불리기도 했던 그의 연주는 단순하지만 명료하고, 때론 날카롭다. ‘짐노페디’가 수록된 첫 번째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기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음악을 중단하기가 어렵다.

/유재후 편집위원 yoojaehoo56@naver.com

짐노페디 1번, 알도 치콜리니 (Satie: Gymnopedie n.1)

https://www.youtube.com/watch?v=0peXnOnDgQ8

Erik Satie - Gymnopédies

https://www.youtube.com/watch?v=_fuIMye31G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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