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 : 무언가 (無言歌, Songs without Words)

30여 년 전 회사에서 3개월가량의 해외연수 기회가 주어졌다. 입사 5년 만에 꿈에 그리던 유럽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파리의 한 은행에서 프랑스어로 진행하는 수업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지루했다. 한 달가량 지나 어느 정도 파리 생활에 익숙해지고 연수기관 담당자와도 친해질 무렵, 수업에 며칠 불참하겠다고 통보한 후 5박6일 일정으로 이태리 여행을 떠났다. 로마, 피렌체, 베니스 3개 도시를 기차로 이동했다. 너무 짧게 잡았다. 피렌체를 떠나 베니스에 도착했을 때엔 미리 티케팅 해놓은 파리 행 기차시간까지 불과 3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여행경비는 바닥이 나 커피 한 잔 사 마실 여유도 없었다. 한 시간가량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맨 후 산타루치아 역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분명 다시 오리라고. 산마르코 광장에서 커피도 마시고, 곤돌라를 타면서 베니스의 아름다운 수로들을 여유롭게 구경하리라고...

독일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멘델스존은 젊은 시절 여행을 많이 다녔다. 20세가 되던 1829년에 7개월간 런던, 스코틀랜드, 웨일즈에 머물렀고, 1830년 10월 초에 베니스에 도착한 후 피렌체, 로마 등 이태리의 주요 도시에서 1년 가까이 보냈다. 그림에도 재주가 많았던 멘델스존은 여행지의 풍광을 스케치하기 좋아했고 그림에 남겨진 여행의 추억을 훗날 음악으로 옮겼다. 5개의 교향곡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제 3번 ‘스코틀랜드’와 4번 ‘이탈리아’는 멘델스존의 여행이 남긴 작품들이다. 영국 북쪽지방의 스산한 날씨와 어우러진 명상적이고 애수를 머금은 ‘스코틀랜드 교향곡’, 남쪽 나라의 밝고 역동적이며 낭만이 가득한 풍광과 인상을 노래한 ‘이탈리아 교향곡’은 ‘바이올린협주곡’, 피아노 소품집 ‘무언가’와 더불어 멘델스존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무언가(無言歌, Songs without words)’는 제목 그대로 가사가 없는 노래집이다. 선율을 들어보면 분명 가사를 붙여 노래하고 싶은 곡조들이나 피아노만으로 연주하도록 작곡했다. ‘무언가’라는 명칭에 대한 유래는 남아있지 않아 아마도 멘델스존 자신이 새로 만들어낸 피아노 곡 형식이라고 추측된다. 그는 거의 전 생애에 걸쳐 총 49곡의 무언가를 작곡했고, 6곡씩 모아 생전에 6개의 모음집으로 36곡을 출판했으며, 유작으로 2개의 모음집과 마지막 작품 한 곡을 포함 총 49개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노래집’인 ‘무언가’를 남겼다. 49곡의 ‘무언가’들 중에는 제목이 붙여진 곡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 제목들은 대부분 출판업자들에 의해 붙여진 것들이고 멘델스존 자신이 직접 제목을 붙인 것은 4곡뿐이다. 그 중 3곡의 제목이 ‘베니스의 곤돌라의 노래’다. 3곡 모두 베니스의 풍광만큼 아름답다. 물결에 따라 출렁이는 곤돌라의 모습과 이태리 민요를 연상시키는 감상적인 선율은 물위에 떠 있는 베니스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49곡의 ‘무언가’ 전곡을 감상하려면 두 시간 넘게 걸린다. 그럴 필요는 없다. 전곡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곡이 아니라 독립적인 곡들이기 때문에 한 곡씩 따로 들어봐도 좋다. 그렇지만 2~3분 연주되는 곡을 하나둘 듣다 보면 어느새 전곡을 다 듣게 된다. 주선율은 마치 노랫가락처럼 뚜렷이 들리고 반주는 부드럽게 선율을 감싼다. 온화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노래도 있고 정열적이고 화려한 선율도 있다. 슬프다가도 이내 경쾌한 가락이 들려와 기분을 전환시켜 준다. 멘델스존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악’과 ‘언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 ... 사람들이 음악을 들을 때 떠올리는 생각들은 아주 애매모호하지. 반면 누구나 말은 알아들어. 내게는 정확하게 그와 반대지. 말 전체만이 아니라 개별 단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단어들도 진정한 음악에 비하면 너무나 애매모호하고, 흐릿하게 보이고, 오해하기 쉬워. 음악은 말보다 천 배는 더 나은 내용으로 영혼을 채워주지. ... 오직 멜로디만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같은 것을 말할 수 있고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한 단어로는 그렇게 동일한 내용을 표현할 수가 없지.”

멘델스존의 말대로 ‘무언가’를 들으면서 곡 하나하나의 의미를 말이나 글로 나타낼 필요가 없다. 언어로 표현하면서 곡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복잡한 형식이나 화성이 없이 가곡 형태로 노래하는 피아노 선율은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여과되지 않은 채 그냥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봄날 저녁 해질 무렵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무언가’를 듣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오래 전 소중한 추억들이 하나씩 떠올려진다. 잠시 동안이나마 복잡한 현실세계를 잊을 수 있다. 가끔씩 ‘무언가’들에 붙여진 제목들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대부분 멘델스존이 직접 붙인 제목은 아니지만 음악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달콤한 추억’, ‘사냥꾼의 노래’, ‘베니스의 곤돌라의 노래’, ‘잃어버린 행복’, ‘젊은 날’, ‘뜬구름’, ‘명상’ ‘5월의 미풍’, ‘봄노래’ ‘잃어버린 환상’, ‘물레질 노래’, ‘이별의 노래’...

2시간이 넘게 연주되는 ‘무언가’ 49곡 전곡을 녹음한 LP음반은 많지 않다. 좋아하는 연주는 프랑스의 여류 피아니스트 지네뜨 두아앵(Ginette Doyen, 1921~2002)의 음반이지만 1953년 녹음이라 상태 좋은 LP를 구하기가 어렵다.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 1895~1956)이 말년에 녹음한 음반은 ‘무언가’의 전설적인 명반으로 손꼽히지만 17개 곡만을 추려 녹음했기에 아쉬움을 남긴다. 1942년생으로 현재 지휘자로서 거장 반열에 오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은 1974년에 전곡을 녹음했다. 젊은 시절의 연주이기 때문인지 기제킹 보다 감정 표현이 두드러지고 속도감이 있다. 예술성은 기제킹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유재후 편집위원 yoojaehoo56@naver.com

멘델스존 ‘무언가’ 중 ‘봄노래’ (Ginette Doyen, piano)

https://www.youtube.com/watch?v=4K84X4GUMbg

멘델스존 ‘무언가’ 중 17곡 발췌 (Walter Gieseking, piano)

https://www.youtube.com/watch?v=7BFGi80d91A&t=2440s

멘델스존 ‘무언가’ 전곡 (Daniel Barenboim, piano)

https://www.youtube.com/watch?v=9V7DYckpj8o&t=18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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