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후의 클래식LP명반 산책] 한 예술가의 인생 에피소드

베를리오즈 :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 Op.14)

올 겨울에는 유독 롱패딩을 걸친 젊은이들을 많이 본다. 흰색도 가끔 보이지만 검정색 롱패딩이 대세다. ‘김밥패딩’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검정색 롱패딩을 입고 함께 몰려다니는 모습을 보면 조금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유독 유행에 민감하다. 아니 청소년들만이 아니라 기성세대들조차 유행을 좇는 경향이 강하다. 10년 전 쯤 프랑스인 사위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한국인의 모습이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었다. ‘옷차림’이라고 답했다. 특히 산행을 함께 했을 때 등산객들의 옷차림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유행에 휩쓸려 살고 있는 우리들 눈에는 당연한 현상들이 외국인 시각으로는 생소하게 보였던 것 같다. ‘좋다, 싫다’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차이를 느낀 것이다. 남들과 같으면 못 견디는 프랑스인들의 기질과 남들과 다르면 불안해하는 한국인의 기질이 다른 것이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인다. 예술의 발전은 근본적으로 남들과 다른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데 있다. 개성이 없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한 분야에서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더라도 그 만의 개성이 없으면 ‘장인’이나 ‘대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예술가는 될 수 없다.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고전주의 시대는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다.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계몽주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음악의 형식을 구현하고, 그 정형화된 형식 속에서 음(音)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자 노력했다. 1820년 무렵 50세 전후의 베토벤은 조금씩 고전주의적 형식의 틀에서 벗어난다. 교향곡에 합창을 삽입하여 형식에 갇힌 음(音)의 한계에서 벗어나 시(詩)를 접목한 음악으로 자신의 이상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4악장 구성의 현악사중주를 5,6,7악장까지 확대하여 내면의 세계를 보다 폭넓게 그려내고자 했다. 개성을 중시하고 형식보다는 내용, 이성보다는 감정을 내세우는 낭만주의 음악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30년 프랑스의 한 젊은 음악가가 고전주의적인 형식과 내용의 틀을 깨는 새로운 교향곡을 발표한다. 전통적인 4악장이 아니라 5악장으로 구성된 곡으로 각 악장마다 표제와 줄거리를 붙였다. 분명 성악이 없이 기악으로만 구성된 교향곡이지만 한편의 소설을 읽듯 줄거리를 담은 교향곡이다. 진정한 낭만주의 음악의 태동을 알린 획기적인 이 작품,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 Op.14)’으로 인해 젊은 무명의 작곡가인 베를리오즈는 ‘표제음악’ 창시자로 서양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1803년 프랑스 리옹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뜻에 따라 파리의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의학공부보다는 음악에 빠져들어 결국 1824년(21세)에 대학을 중퇴하고 늦은 나이에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26년(23세) 파리음악원에 입학해 작곡을 배운 후 몇몇 작품들을 썼으나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듬해 베를리오즈는 인생에 있어 가장 극적이면서도 중요한 사건을 경험한다. 파리의 한 극장에서 셰익스피어 연극을 관람하다가 여주인공 역의 영국 배우 스미드슨에게 반해 구애했지만 거절당했다. 짝사랑으로 괴로워한 무명의 작곡가는 심한 절망으로 이성을 잃은 채 한동안 방황했고, 3년 후 이 짝사랑의 열정을 자서전적으로 표현한 음악이 1830년에 발표한 ‘환상교향곡’이다. 이 작품으로 유명해진 덕인지 아니면 베를리오즈의 끊임없는 열정에 감복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1833년 그는 ‘환상교향곡’ 주인공인 스미드슨과 결혼했다. 그렇지만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으며, 오랜 별거생활 끝에 결국 1844년 이혼했다.

베를리오즈는 ‘환상교향곡 - 한 예술가의 인생 에피소드(Episode de la vie d'un artiste)’를 출판하면서 악보에 표제를 붙여 곡의 내용을 암시했다. “사랑에 미치고 인생이 싫어진 젊은 예술가가 자살하고자 아편을 마신다. 아편의 분량이 치사량에 이르기엔 약해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꾼다. 환상 속에서 예술가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진다.” 각 악장에도 제목을 부여하고 줄거리도 기술했다. (제 1악장) ‘꿈, 정열’ - “연인을 만나기 전의 예술가는 불안하면서도 미묘한 흥분을 느낀다. 연인을 만나는 순간 뜨거운 사랑이 불붙고, 광기에 가까운 고뇌와 질투에 따른 노여움이 연정과 교차된다.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종교적 위안을 느낀다.“ (제 2악장) ‘무도회’ - “떠들썩한 축제날 무도회에서 연인의 모습을 다시 본다.” (제 3악장) ‘들판의 정경’ - “어느 여름날 해질 무렵, 예술가는 들에 나가 두 사람의 양치기가 번갈아 부는 피리 소리를 듣는다. ... 연인을 향한 밝은 희망이 그의 마음에 평안을 준다. 그러나 연인의 모습을 떠올리자 문득 그녀가 배신하지 않을까하는 불안한 예감이 든다. 양치기의 피리 소리도 하나밖에 들리지 않는다. 날은 완전히 저물고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린다. 고독과 정적이 감돈다.” (제 4악장) ‘형장으로의 행진’ - “젊은 예술가는 꿈속에서 연인을 죽였다.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으로 향한다. ... 꿈 속 죽음의 순간 연인의 모습이 잠시 보인다.” (제 5악장) ‘마녀들의 밤의 환영’ - “예술가의 장례식에서 마녀들이 잔치를 벌이고 그는 그 광경을 보고 있다. ... 그리운 연인도 마녀가 되어 잔치에 참석한다.

베를리오즈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환상교향곡’은 전통적인 교향곡의 틀에서 탈피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적 양식인 ‘표제음악’의 선구자 격인 작품이다. 리스트가 창시한 ‘교향시’의 모태가 되었으며, 각 악장에 ‘고정 악상(idée fixe)’의 개념으로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연인의 선율은 후일 바그너의 작곡 기법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평가되는 곡이기에 녹음된 음반도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 하나의 음반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샤를르 뮌슈(Charles Munch)가 파리관현악단과 함께 한 음반을 택한다. 프랑스 작곡가의 에스프리(esprit, 프랑스인 특유의 발랄한 지성적인 정신)를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관현악단이 제격이다.

/유재후 편집위원 yoojaehoo56@naver.com

베를리오즈 : 환상교향곡, 샤를르 뮌슈, 파리관현악단 (1967)

https://www.youtube.com/watch?v=gfI9da_bwXY

 
본 기사는 교육신문 베리타스알파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일부 게재 시 출처를 밝히거나 링크를 달아주시고 사진 도표 기사전문 게재 시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저작권자 © 베리타스알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