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 : 연가곡집 ‘겨울나그네(Die Winterreise, D.911)’
서울의 인사동이나 홍대 앞 등 관광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는 ‘거리 연주가’들을 쉽사리 만난다. 그들은 행인들로부터 돈을 받으려고 공연하는 것 같지는 않다. 상당한 실력을 갖춘 그들은 관객들의 호응과 환호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는 자기만족 형이거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려는 목적으로 공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마주친 ‘busker(통행인들에게 돈을 얻고자 거리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생계유지 수단으로 버스킹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나마 귀에 익숙한 ‘올드팝’을 멋지게 부르거나, 남미나 아프리카의 이색적인 리듬과 멜로디가 들려오는 곳에서는 제법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 하나로 열심히 연주하는 고학생 주변은 항상 한산했다.

버스킹(busking)은 유럽에서 오래 전부터 있었던 생계수단이었던 듯하다. 19세기 초 독일의 낭만파 시인 빌헬름 뮐러는 연작 시집 ‘겨울여행’ 중 ‘거리의 악사’라는 시를 통해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노인의 모습을 처량하게 그려내고 있다. / 마을 뒤 저 편에 거리의 악사가 서있네 / ... / 그의 작은 접시는 항상 비어 있네 / 아무도 그를 들으려 하지 않고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네 / ... / 이상한 노인이여, 내가 함께 해도 되겠소? 내 노래에 맞추어 악기를 연주해 주겠소? /

연작 시집이라고 해도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줄거리는 없다. 실연한 청년이 광기에 가까운 슬픔을 안고 추운 겨울에 방황하는 심정을 24편의 시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 나그네에게는 일말의 구원 가능성이 없어 보이고, 시 전편에 흐르는 분위기는 어둡다. 겨울, 눈, 바람, 눈물, 암흑, 환상, 죽음 등의 시어들로 가득 차있다. 비슷한 연배의 뮐러의 시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가곡의 왕’ 슈베르트는 1827년, 30세에 ‘겨울 여행’ 24개 전체 시에 곡을 붙였다. 뮐러는 그 해 9월 33세로 숨졌고, 그 이듬해 11월 슈베르트도 3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30여 년 간의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의 인생은 단순하다. 20세 전후 몇 년간의 교편생활, 이후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음악 사교모임인 ‘슈베르티아데 schubertiade’ 활동 외에는 특별히 남아있는 삶의 기록이 없다. 소심하지만 보헤미안 기질을 지닌 슈베르트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는 항상 명랑하고 태평하며 행복해 했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시간들은 고독과 절망 속에서 오로지 작곡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방황하던 시절, 20대 초반에 얻은 불치병으로 인한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그의 삶 속에서 구원의 손길은 오로지 음악과 시였다. 어둡고 비극적인 그의 말년의 심정을 음악으로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 연가곡집 ‘겨울나그네’다. 원제명은 뮐러의 시집과 동일한 ‘겨울여행 Die Winterreise(The Winter Journey)’이지만 우리말 제목의 ‘겨울나그네’가 시의 내용이나 가곡의 분위기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전체 24곡 연주시간은 70분이 넘는다. 전 곡을 쉼 없이 감상하는 것이 좋지만, 특별한 줄거리가 없기 때문에 제5곡 ‘보리수’를 비롯해 잘 알려진 몇 곡을 추려 듣더라도 ‘겨울나그네’의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제 1곡. ‘밤 인사(Gute Nacht)’ --- 실연한 청년이 겨울밤에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을 떠난다. / 떠나는 길에 그대 집 문에 ‘잘 자 good night’라고 써 놓으리라 / 내가 그대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언젠가는 알 수 있도록

제 5곡. ‘보리수(Der Lindenbaum)’ --- 가장 아름답고 많이 알려진 곡이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 단 꿈을 꾸었네 / 가지에 숱한 사랑의 말 새기고 /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 ... /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모자를 벗겨 가도 난 꿈쩍하지 않았네 / 이제 그 곳을 지나친지 한참 지났지만 아직 나무의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 ‘그 곳에 너의 안식처가 있다’ 이렇게 말하듯

제 6곡. ‘홍수(Wasserflut)’ --- ‘흘러넘치는 눈물’이라는 제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 흘러넘치는
 눈물은 흰 눈 위에 떨어지고 / ... / 흰 눈이 녹아 내 눈물을 따라 흘러, 따뜻해질 때면 연인의 집에 다다르리

제 11곡. ‘봄날의 꿈’ --- 꿈을 꾸는 동안 밝은 곡조로 노래하나 후반부엔 꿈이 깨져 다시 암담한 현실로 돌아온다. / 5월의 활짝 핀 꽃들을 꿈꾸었네 / ... / 닭 우는 소리에 눈을 뜨니 둘레는 춥고 어둡다 / ... / 홀로 앉아서 꿈을 되새겨 보네

제 13곡. ‘우편마차(Die Post)’ --- 연인의 소식에 대한 설렘으로 밝게 시작하지만 곧바로 슬픈 곡조로 현실을 한탄한다. / 우편마차의 나팔소리다. 내 마음 어찌 이리 설레는가? / 내겐 아무런 편지도 올 리 없건만 / ... / 우편마차는 그 곳에서 왔다. 내 사랑하는 연인이 살고 있는 거리 / ... /

제 24곡. ‘거리의 악사’ --- 마지막 곡이지만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길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노인의 쓸쓸한 모습에서 나그네는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와 동질감을 느낀다. 동행하면 서로에게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 ... / 이상한 노인이여, 내가 함께 해도 되겠소? 내 노래에 맞추어 악기를 연주해 주겠소?

슬프고 고독할 땐 그런 분위기의 음악을 들어야 위로가 된다. 겨울로 접어드는 12월 초, 찬바람 불고 메마른 가지들이 처량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 ‘겨울나그네’를 듣고 있으면 가슴은 한없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제랄드 무어의 반주로 노래한 바리톤 디트리히 휘셔 디스카우의 음반을 최고로 꼽지만 더 낮은 음역으로 부르는 한스 호터(Hans Hotter, 1909~2003)의 어두운 목소리가 더 호소력 있게 들리기도 한다. 특히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늙은 악사의 처량한 모습과 나그네의 한탄이 마치 한없는 고독에 내 던져진 황혼의 인생길을 위로해 주는 듯 가슴을 울린다.
/유재후 편집위원 yoojaehoo56@naver.com

슈베르트 : 겨울나그네 (Hans Hotter, Gerald Moore 피아노)

https://www.youtube.com/watch?v=H_X6WBVR1mU&start_radio=1&list=RDH_X6WBVR1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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