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Rhapsody on a Theme by Paganini, Op.43)
30여 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누님이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 띠 동갑이라 70을 훌쩍 넘긴 나이가 돼버린 그녀의 모습은 조금 생소하게 느껴진다. 나에게 남아있는 젊은 시절의 누나는 예쁘고 활발하며, 책과 음악을 무척 좋아한 여성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보았던 그녀의 결혼식 장면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60년대의 틀에 박힌 순서에 따른 여느 결혼식과 비슷했겠지만 식장에 울려 퍼진 행진곡은 달랐다. 신부입장인지 신랑신부 퇴장 장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린 내게도 익숙했던 멘델스존이나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은 아니었다. 그 행진곡은 결혼식 전 며칠 동안 누나가 집에서 자주 들었던 음악이었다. 차분하면서도 무척 아름다운 그 멜로디는 면사포를 쓴 예쁜 누이가 옮기는 발걸음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 곡이 러시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중 18번째 변주 ‘안단테 칸타빌레’라는 것을 알았다. 수 없이 많은 결혼식을 가보았지만 이 곡을 행진곡으로 사용한 결혼식은 보질 못했다. 아마도 전 세계 어디에서도 이 곡을 결혼식 행진곡으로 사용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라흐마니노프(Sergei V. Rachmaninoff, 1873~1943)는 러시아 귀족집안 출신으로 교양 있는 어머니로부터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후, 9세에 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 입학했다. 6년 후 모스크바음악원으로 전학한 후에는 피아노연주 외에도 작곡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인 1890년 17세에 피아노협주곡 1번을 발표해 작곡가로서의 재능도 인정받았다. 이후 자신감을 얻어 오페라, 피아노 소품집, 피아노3중주 등을 작곡해 점차 명성을 높여가던 중, 1895년에 야심차게 발표한 ‘교향곡 1번’에 쏟아진 무자비한 혹평에 의기소침해져 작곡가로서의 자신감을 잃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결국 친구의 권유로 모스크바의 저명한 정신의학박사이자 최면술사인 니콜라이 다알(Nicolai Dahl)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신경쇠약 증세는 점차 호전되었고, 1900년 5월, 5년여에 걸친 우울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후에야 다시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병마로부터 벗어난 이후 첫 번째로 완성한 곡이 바로 그의 최고 걸작인 ‘피아노협주곡 2번’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피아노 연주로 이 곡을 초연해 대단한 찬사를 받았고, 이후 교향곡 2번, 피아노협주곡 3번 등 명곡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과 미국에까지 떨쳐졌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자 귀족집안 출신인 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이듬 해 미국으로 이주해 1943년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비교적 순탄하고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미국에 정착한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의 비르투오소(virtuoso, 뛰어난 기교의 명인)로 알려져 작곡보다는 연주활동을 많이 했다. 겨울과 봄엔 미국, 가을엔 유럽에서 연주 여행을 다니고 여름엔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내는 생활을 거의 매년 되풀이했다. 이국땅에서 경제적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생활 패턴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새로운 작품이 나타나기까지는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만 했고, 25년간의 미국생활 중 작곡한 곡은 6곡에 불과하다. 게다가 말년의 그 작품들은 러시아를 떠나기 전 젊은 시절의 곡들과 비교해 볼 때 작품성이나 인기도에 있어 결코 우위에 둘 수 없는, 그의 대표작으로 분류하기가 어려운 곡들이다. 다만 1934년 61세에 작곡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Rhapsody on a Theme by Paganini, Op.43)’ 만큼은 예외다.

휴가차 스위스 루체른 별장에서 지내던 1934년 여름 불과 두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완성한 이 작품은 피아노협주곡의 형식을 차용했지만 악장 구분없이 주제와 24개의 짧은 변주곡(variation)들로 이루어져있다. 바이올린 비르투오소의 선구자인 파가니니(Nicolo Paganini, 1782~1840)의 작품 ‘24개의 카프리스’ 중 마지막 24번째 곡을 주제로 라흐마니노프는 24개의 다양한 변주를 전개시킨다. 변주곡의 일반적인 구성인 ‘주제 제시 후 첫 변주가 시작하는’ 형태에서 벗어나 제 1변주를 관현악으로 강렬하고 짧게 시작한 후에 ‘파가니니의 주제’를 제시한다. 이후 피아노의 현란한 기교와 관현악의 장중하면서도 화려한 색채가 잘 어우러진 변주곡들이 때로는 빠르고 강렬하게, 때로는 느리고 우아하게 전개되다가 18번째 변주인 ‘안단테 칸타빌레’에서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이전의 변주곡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감미롭고도 애잔한 선율이 피아노 독주로 조용히 시작하다가 점차 관현악이 합세해 찬란하게 마무리하는 이 ‘18변주’는 이 작품의 백미로 라흐마니노프 전체 작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다. 18변주가 끝나면 언제나 아쉽다. 그 선율이 남긴 잔상이 강렬해 19변주부터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다. 격정적이고 화려한 마지막 24변주에 이르러서야 18변주의 여운이 사라지고 음악이 다시 들린다.

녹음이 가능한 시기에 작곡된 곡이라 라흐마니노프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한 음반이 남아있다. 역사적인 명반이지만 SP시대 녹음으로 음질이 다소 열악한 점이 아쉽다. 50년대 말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시카고 심포니와 협연한 음반이 전설적인 명연주로 첫손에 꼽힌다. 특히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비교적 담담한 터치로 그려내는 18변주는 차분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유재후 편집위원 yoojaehoo56@naver.com

Rachmaninoff : Rhapsody on a Theme by Paganini, Rubinstein (18th Variation) -영상보기 클릭
https://www.youtube.com/watch?v=h_BArG3ollw
Rachmaninoff : Rhapsody on a Theme by Paganini - BBC Proms 2013 (Stephen Hough) - 영상보기 클릭
https://www.youtube.com/watch?v=c33q87s03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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