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카페에 가면 이어폰을 낀 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을 많이 보게 된다. 소음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겠지만 어쩌면 음악을 듣고 있어야 집중이 더 잘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용한 독서실에서는 오히려 잡념이 생겨 능률이 떨어지는 학생들이다. 나 역시도 그런 편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일요일엔 주로 음악감상실에서 보냈다. 수학책 하나만 들고 갔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수학문제를 풀면서도 음악은 들려왔고, 음악 속에 파묻혀 30여 분 보내고 나면 어려워 포기하고 있던 문제들이 술술 풀리는 경이로움을 경험하기도 했다.

1975년 1월 대학입학시험 날이었다. 시험과목이 많아서 이틀에 걸쳐 입시를 치렀다. 첫 날인지 둘째 날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점심시간 후에 바로 수학시험이었다. 암기과목이 아니라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근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은 후 가끔씩 들르던 학림다방으로 갔다. 불과 1분여 후에 나를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음악감상실에서 자주 신청해서 들었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조용히 명상적인 분위기에서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율에 이내 빠져들었고 3악장까지 다 듣고 난 후 다소 멍한 상태에서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이 시작되었지만 1악장의 주제는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다. 7개의 주관식 문제들을 훑어보고는 한 문제도 풀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다.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할수록, 문제가 어렵게 느껴질수록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은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10여 분을 헤맨 후 거짓말 같은, 소설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났다. 도저히 풀어낼 자신이 없어 포기했던 마지막 적분 문제까지 답을 써내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답이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합격했다.

처음 클래식음악에 입문할 때 우선적으로 들어봐야 할 곡으로 소위 ‘4대 교향곡’과 더불어 ‘4대 바이올린협주곡’이 종종 거론된다. 그렇게 획일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인기 있고 많이 연주되는 곡들임에는 틀림없다. 남성적이고 웅장한 스케일의 베토벤, 섬세하고 낭만적인 선율이 아름다운 멘델스존, 억제된 감정 속에도 열정이 느껴지는 중후한 분위기의 브람스, 거기에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포함시킨다.

차이코프스키(Peter Ilitch Tchaikovsky, 1840~1893)의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은 불행을 딛고 다시 창작력이 샘솟기 시작한 1878년, 그의 나이 38세에 작곡되었다. 불과 2주 만에 파경에 이른 결혼생활의 충격에서도 서서히 벗어나고, 부유한 미망인으로부터 조건 없는 거액의 연금을 받기로 했기에 교수직도 사임하고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기였다. 요양 차 스위스에 머물면서 협주곡을 구상하고 있었고, 때마침 러시아에서 찾아 온 한 바이올리니스트의 도움을 받아 불과 한 달 여 만에 완성했다. 작곡자 자신은 매우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연금 후원자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도 “이 협주곡을 작곡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는 표현을 했을 정도다. 완성된 곡을 당시 러시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레오폴드 아우어(Leopold Auer, 1845~1930)에게 헌정하면서 연주를 부탁했다. 그렇지만 거절당했다. 아우어의 대답은 “기술적으로 연주가 불가능하다”였고, 거장의 한 마디로 인해 러시아에서는 연주되지 못한 채 묻혀 있었다. 초연은 그로부터 3년 후 라이프찌히 음악원 교수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돌프 브로츠키(Adolf Brodsky, 1851~1929)의 연주로 빈에서 이루어졌다.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은 친숙해질수록 더욱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동시대 러시아 음악계의 중심세력이었던 국민학파와는 달리 그는 독일 등 서방세계의 음악과 러시아의 민족적 선율을 융합시켜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지역적인 음울함과 세기말의 염세적인 분위기, 그리고 신경쇠약 증세와 동성애 등 작곡가의 고통이 매혹적인 선율 속에 녹아들어가 이전의 작곡가에게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보여준다.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적인 시기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도 러시아의 민속적 색채를 가득 담은 아름다운 선율들이 애절하고 서정적으로, 때로는 화려하고 격정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1악장 관현악의 도입부분에 이어 연주되는 제 1주제는 몇 번을 반복해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곧바로 바이올린 독주로 재현되는 이 주 선율이 관현악 총주로 강렬하게 휘몰아치며 다시 나타나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2악장 ‘칸쪼네타(작은 노래)’의 바이올린은 잔잔한 관현악 반주와 함께 그리움인지 탄식인지 모를 슬픔의 곡조를 더없이 아름답게 그려낸다. 이어 쉼 없이 계속되는 마지막 3악장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쾌활한 춤곡의 형태로 바이올린이 한껏 기교를 뽐내며 끝을 맺는다.

‘연주 불가능 곡’이라는 혹평과 함께 연주하기를 꺼려했던 레오폴드 아우어도 나중엔 이 곡의 진가를 인정하고 직접 연주를 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가르쳤다. 미샤 엘만,야샤 하이페츠, 나탄 밀스타인 등 음반 컬렉터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들 모두 아우어의 제자들이다.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한 수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음반 중에서 한 장만을 골라내기는 어렵다. 그 중에서도 냉철하고 빈틈없는 하이페츠의 음색은 정말 매혹적이고 항상 긴장하게 만들어 자주 손이 간다.
/유재후 편집위원 yoojaehoo56@naver.com

차이코프스키 : 바이올린 협주곡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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